뿌리를 내리는 버팀의 힘
둘째를 임신하고 여자아기인 것을 알게 되었다. 샛노란 아기 옷을 한 벌 샀다. 다른 육아 용품은 첫째아이 물건을 쓰면 되지만, 산뜻한 새 옷 한 벌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자궁경부무력증과 수술을 거치면서 그 옷을 옷장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혹시 아기가 잘못되면, 저 옷을 어쩌나 싶었다. 괜히 샀다. 도저히 버릴 수도, 둘 수도 없다. 나는 […]
둘째를 임신하고 여자아기인 것을 알게 되었다. 샛노란 아기 옷을 한 벌 샀다. 다른 육아 용품은 첫째아이 물건을 쓰면 되지만, 산뜻한 새 옷 한 벌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자궁경부무력증과 수술을 거치면서 그 옷을 옷장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혹시 아기가 잘못되면, 저 옷을 어쩌나 싶었다. 괜히 샀다. 도저히 버릴 수도, 둘 수도 없다. 나는 […]
살면서 변비로 고생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장건강 천재다. 수험생 때에도, 전공의 때에도, 임산부 때에도 1분컷 쾌변을 자랑했다. 그런 내가 자궁경부 수술 3일차를 맞아, 병동 화장실만 들락날락하며 변을 못 보고 있다. 끙끙대다가 회진 때 변비약을 요청했다. “수술 직후 누워있었으니 변비가 쉽게 옵니다. 약 처방 해드릴게요.” “네 그것도 그런데요… 무서워서 변을 못보겠어요.” “무섭다니요?” “아니 왜… 만약에
자궁경부무력증으로 수술을 받은 후에도 직장 생활과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자궁 수축도 없었고, 경부길이도 더 짧아지지 않았다. 퇴원 후 외래 진료일, 담당 교수님은 내 경과가 양호하다는 설명과 함께 눈을 반짝였다. “그거 마침 잘 되었어.” “저도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감사해요.” “산모님이 산부인과 의사니까, 이제 우리 병원에서 일하면 어때요. 사정 알다시피, 일손이 영 부족해.”
산부인과 레지던트 1년 차이던 어느 평범한 하루. 이 날 출근은 아침 5시 30분까지였다. 밤 사이 환자 현황과 상태를 파악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집중 감시, 태아심박 모니터링이다. 나는 고위험 산모 병동을 순회하며 산모들에게 자궁 수축 강도와 태아 심박동을 확인할 수 있는 기계를 부착한다. 검사에는 최소 20분의 시간이 소요된다. 내가 검사 결과지를 확인하면, 나의 윗년차가 확인하고, 그다음
솔직히 고백한다. 나는 금수저다.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나는, 그러니까, 출산 금수저다. 임신 초기엔 지속적인 출혈로 마음을 졸였다. 중기에는 자궁경부무력증으로 수술을 받았다. 후기에는 조기진통으로 또 입원했다. 내 둘째 임신은 무난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고위험 임신을 경험하는 바람에 내가 이렇게나 고생했다고 생색 낼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나야말로 가장 운 좋은 산모였다. 출산에 관련된 모든 변수들이 초록불이었다.
과거 대학병원에서 근무할 당시의 전형적인 회진 풍경이다. 나는 한 손에 볼펜, 다른 손에 수북하게 환자 명단, 경과에 대한 메모와 검사 결과지를 들고 분주하게 산과 병동을 누빈다. “산모분, 오늘 좀 어떠세요, 증상은 괜찮나요?” 핼쑥한 얼굴의 산모가 대답한다. “괜찮아요.” “아기는 잘 놀고요?” “네, 태동도 잘 느껴져요.” “다행입니다. 오늘 검사 결과는 이만저만하고요, 혹시 이런저런 변화가 생긴다면…” 당시에는 미처
여기까지가 현대 의학 승리의 이야기이다. 항생제와 수혈, 초음파와 제왕절개가 만들어낸 극적인 전환. 1%에 달하던 모성 사망률이 0.01% 이하로 떨어진 놀라운 성취. 버티고, 지켜보고, 결단하는 현대적 산과학의 전략과 기술. 하지만 이 서사에는 중대한 전제가 숨어있다. 이것은 부유하고, 의료 자원이 풍부하며, 정보 접근성이 보장된 환경에서만 가능한 낙관적인 이야기라는 점이다. 동전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존재한다. 닿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