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산전 기형아 검사, 제가 설명해보겠습니다

앞선 글에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페임랩에 참가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다는 생각(혹은 착각!)은 딱히 누가 시키지도 않은 데다가, 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평소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에 굳이 덤빌 이유로 충분하지 않다. 당연히 다른 계기도 있었다.

나는 그맘때쯤 동료 의사의 부탁을 받고 환자 배포용 검사 설명지를 작성했다. NIPT라는 꽤나 최신 기술을 접목한 태아 기형아 검사를(정확히는 세포유리 DNA를 활용한 태아 염색체 이상 선별검사. 겁먹지 마시라. 이 용어에 대해서 뒤에서 부연하겠다.) 해설하는 글이었다. 진료실에 비치했다가 산모들에게 나눠주는 용도로 썼다. 진료시간은 짧고, 검사를 자세히 설명하기는 힘들다. 애를 써서 설명한다 치더라도 너무 복잡한 내용은 잘 기억하기가 힘들다. 보통 어느 종류의 기형아 검사를 받을지 산모가 직접 선택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보가 너무 빈약한 셈이다. 인터넷에 불량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좋은 취지라고 생각해서 한두 장 분량의 글을 써주었다. 일필휘지로 멋지게 써내려… 갔으면 좋았으련만, 머리를 쥐뜯어가며 겨우 썼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인데도 완성된 글로 표현하려니 내 수준이 그 지경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즐거웠다. 대다수의 이과 출신 사람들처럼, 나도 살면서 글쓰기를 따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짧은 글이라도 두서 있게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어려운 일에 뭔가 만족감을 느꼈다. 어쩌면 허영심일 수도 있다. 겨우 딱 한 편의 글을 완성했을 뿐이지만 어엿한 정보 콘텐츠의 생산자가 된 것이 뿌듯했다. 내가 10대 시절부터 동경하던, 멋진 과학책을 쓰는 사람들처럼.

하루하루 치열하게 과학 연구를 하고, 감동적인 인사이트가 가득한 과학 저술을 선보이는 사람들. 어린 나에겐 입이 쩍 벌어지게 멋져 보였다. 고등학생 시적 과학책에 빠져 살면서 이과생이 되었고, 연구자를 동경해서 이공대학에 진학했었다. 생물의 심오함, 물질의 성질, 우주의 방대함은 공상하기 좋아하는 나에게 마력 그 자체였다. 하지만 대학에서 전공수업을 들어보니 ‘심각 과학’은 ‘교양 과학’과 달리 내 역량을 아득히 넘어섰다. 노래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해서다 가수가될 수는 없는것처럼. 별다른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진로를 변경하여 의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취미 삼아 과학 강연을 듣고 과학책을 읽는다. 과학 유튜브와 팟캐스트의 애청자이며, 정기적으로 과학 재단을 후원한다. 물론 진지한 공부는 아닐지라도, 오랫동안 교양 과학의 소비자로서 살아왔다. 그런 내가 기나긴 세월을 지나 이젠 전문의 면허가 생겼으니, 비로소 지식 콘텐츠의 생산 자격이 생긴 것만 같아 들떴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고, 더 이상 대학병원에서 일하지 않으니 독립적인 연구분야가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도 입이 간질간질, 내가 좋아하는 산부인과학의 과학적인 일면을 소개하고 싶었다.

페임랩 경연은 PPT 대신 간단한 소품을 이용한 발표로 이뤄진다. 나는 아기가 들어선 아기집을 표현하기 위해서 인형이 들어간 투명 풍선을 준비했다. 이 값비싼 소품으로 전달하고 싶은 주제는? 역시 NIPT였다. (이 시점으로부터 2년 후 내가 임신했을 때, 태아 기형 의심 소견이 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실 산전 기형아 검사는 아주 매력적인 소재이다. 임신한 사람들은 다들 아기의 상태를 염려하고, 검사의 종류가 조금씩 다를지언정 한 번씩 선별 검사를 거쳐간다. 그러다 보니 임신 초기에 시행하는 기형아 검사는 소수의 질환자들만 관심을 갖는 테마가 아니고, 제법 대중적이고 잘 알려진 검사 기법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아기를 낳은 경험이 있다면, 후술 할 기형아 검사 관련 내용은 아주 친숙할 수도 있다.

NIPT는 우리말로 ‘비침습적 산전 검사’이며, 세포유리 DNA(cell-free DNA)를 임산부의 피에서 추출해서 태아 기형 가능성에 대한 결과값을 내놓는다. 임신한 여성의 혈액 속에는 태아로부터 유래한 아기의 DNA 조각이 떠다닌다.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이 미세한 부스러기들로부터 태아의 각종 염색체 이상을 태어나기도 전에 높은 정확도로 미리 알아낼 수 있다. NIPT 방식을 통하면 기존의 선별검사보다 더 촘촘하게 태아 이상을 잡아낸다. 고령 산모가 많다 보니 태아 기형 우려도 더욱 높아지는 현실에서 각광받는 검사기법인 이유이다.

이 기술의 방점은’비침습적’이라는 용어에 있다. 사실 태아의 DNA를 얻는 더 확실하고 직접적인 방법은 아기집을 ‘침습적인’ 바늘로 찔러서 내부를 채우고 있는 양수를 얻는 것이다. 그러면 아기의 세포를 뽑아낼 수 있다. 세포의 핵 안에는 염색체가 있으므로, 부스러기가 아닌 온전한 유전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방식을 양수검사라고 부른다. 양수검사는 세포에서 직접적인 유전정보를 얻기 때문에 선별이 아닌 확진이 가능하다. 하지만 검사 방식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산모 배에 대바늘을 꽂아 넣어야 하므로 낮은 확률일지언정 아기가 잘못될 수 있다. 물론 의사가 초음파로 내부를 관찰하면서 안전하게 시행하지만, 겉보기에 상당히 아찔하기 때문에 산모 입장에서 간단히 결정하기는 어렵다. 반면 비침습적 산전 검사, NIPT 기법은 아기집을 건드리지도 않는다. 엄마의 피만 뽑을 뿐이다. 혹자는 질문할 수 있다. 임산부한테 채혈하는 것도 어쨌든 찔러서 뽑아가는 것 아니냐고? 그 정도는 의학에서 ‘침습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침습적이라는 말은 수술이나 시술처럼 직접적으로 인체에 작용하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의 위험이 동반될 때에 쓰는 말이다.

NIPT는 세포유리 DNA를 발견하고, 검출을 가능하게 한 최신 과학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다. 실제로 산부인과 진료 현장에서 흔히 쓰인다. 뜬구름 잡는 구상 단계의 가설이 아니고, 진작에 상용화되어서 현실에서 잘 작동하고 있는 기술이다. 게다가 누구나 알 법한 과학 얘기라면 식상하겠지만, 모든 사람이 알 만큼 오래된 개념은 아니다. 발표에 쓰일 언어도 그렇다. 무슨무슨 DNA에다가 무슨무슨 태아 기형아 검사기법이라니, 아주 과학적으로 들리는 멋진 말들의 향연이다. 나는 대중과학 강의에 딱 맞는 주제를 발굴했다고 생각하고 혼자 흡족했다. 잘 전달할 수 있다면, 나의 첫 과학커뮤니케이션 시도는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알아? 여기서 상을 타고, 영국에서 하는 국제 대회에도 나갈 수 있게 될지. 대학생과 젊은이들 틈바구니에서 아줌마는 꿈에 부풀었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정보를 담은 강의라도 사실만 실어 나르면 밋밋하다. 의미를 담아야 한다. 내가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다.

어쩐지 불편하고 어색한 산부인과. 과학이라는 키워드로 조금이나마 호감을 갖게 만들고, 친근해질 수는 없을까? ‘비침습적’이라는 키워드를 가져와 소개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산전에 기형아에 대한 기존 검사법도 이미 있고, 더 정확한 확진법도 있다. 비침습적 검사라고 해서 완전히 새로운 정보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산모가 덜 불편하려면, 검사의 정확도를 개선하려면 또 다른 방법도 있어야만 한다는 고민에서 나온 핵심 아이디어가비침습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내 이야기의 맥락에서는, 비침습적인 검사라는 것은 사실 의학이 지닌배려심에 대한 메타포이다. <산부인과 진료가 낯설고 꺼려질 수는 있지만, 우리도 이렇게 애쓰고 있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닌, 당신을 위해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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