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연금술사라는 만화에는 연금술로 인체를 만들어내려는 어린 형제가 등장한다. 아이들은 죽은 엄마를 연성하기 위한 재료를 준비하고 금지된 술법을 시도한다. 사람 몸을 구성하는 원소는 의외로 그렇게 심오하지는 않다.평균 성인 1명을 기준으로 물 35리터, 탄소 20킬로그램, 암모니아 4리터, 석회 1.5킬로그램, 인 800그램, 염분 250그램, 질산칼륨 100그램, 유황 80그램, 플루오린 7.5그램, 철 5그램, 규소 3그램, 기타 미량 원소 15가지이다.모든 원소를 준비해서 시연한 연금술은 실패하고, 끔찍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이 만화의 세계관에서 ‘등가교환’이 절대적인 법칙인지라, 단순한 재료의 합계는 한 명의 온전한 인간을 환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금술이 현존하지는 않지만 현실도 어떤 맥락에서는 비슷하다. 배아의 발생과 세포의 분열만으로 한 명의 온전한 인간이 탄생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무엇이 더 필요한가?
아기를 낳고 한두 달쯤 지나면 산모들이 산부인과에 ‘산후 검진’을 받으러 온다. 나는 습관처럼 “좀 어떠세요? 아기는 잘 커요?”라고 묻는데, 대답이 보통 저렇다. 가끔은 내가 안부를 묻기 전에 먼저 하소연하기도 한다. “저는요, 이런 것일 줄은 전혀 몰랐어요! 왜 아무도 말을 안 해줬을까요?” 아줌마가 된 지금은 웃으면서 수다로 기분을 풀어줄 수 있다.호르몬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을 시기이다. 이제 막 아기를 낳은 그들에게는, 환기와 공감이 가장 필요한 것임을 아니까.
하지만 이 질문의 형식을 띤 호소에 응답하기 이전에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아무도 안 알려줬다> <전혀 몰랐다> 임신-출산-육아가 미혼, 미출산 여성들에게완전한 미답지로 남은 것이 원래 자연스러운 인간 사회의 모습일까? 보통 첫째 낳은 초보 엄마들은, ‘마시면서~배우는~ 랜덤~ 게임♪’처럼 재생산의 사슬에 떠밀려 들어간다. 대학교에 갓 입학한 신입생처럼, 선배들은 다 아는 술게임을 나만 몰라서 자꾸 벌칙 당첨이다. 그리고 뒤늦게 당황하게 된다. “잠깐만요! 나 이 게임 모르니까, 누군가가 알려줘야죠!” 물론 필수적인 것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임신-출산-육아의 경험은 생활 전체가 통째로 바뀌어버리는 것이니 모든 장면을 교육으로 대체할 수도 없다. 이미 시작되어 버린 술자리 게임을 강의나 수업으로 미리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취기로 휘돌아가는 술놀음에서 규칙 모른다고 투정 부리는 것도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초보 엄마들이 준비성이 없다고 힐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신생아 아기를 키우며, 어릴 적 나를 키워준 할머니한테 똑같은 하소연을 했다.
“할머니, 아가 돌보기가 너무 힘들어요. 요새 잠도 통 못 자요.”
내 마음의 고향 할머니. 소중한 손녀가 몸 혹사하며 산부인과 의사 하는 것이 고생스러울까 봐 말리고 싶어 하던 할머니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따사롭겠지?
“애 보기가 힘들어? 에어콘 켜놓고 세탁기 돌려가면서 힘들기는 엠병! 느그 어멈 키울 적엔 냇가에서 천기저귀 두들겨가며 빨았다. 요즘 맨치로 키우면야 애 열두 키우것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구먼…”
아아… 그렇다. 할머니 시절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물질적 여건이 좋아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불리한 점도 있다. 저 대화를 나눌 당시에는 할머니의 벼락같은 불호령에 한 마디 대꾸도 못 했지만, 늦게나마 반박을 해보자면 이렇다. 지금은 대가족과 이웃이 풍부한 돌봄을 기꺼이 나누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출근을 하려면 발 동동 굴러가며 베이비시터를 구해야 한다. 삼십 년 전 할머니는 볼일이 있으면 나를 간단히 옆집 아주머니들에 맡기곤 하셨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내가 에어컨 세탁기와 신선놀음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기와 눈 마주치고 대화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대신할 수가 없다. 아마 자동 기저귀갈이 로봇이나 자동 수유 기계가 등장해도, 살갗을 맞대는 돌봄의 제공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핵가족 위주의 현대 사회에서 힘을 합쳐 다음 세대를 돌보는 인적 공동체는 잘게 분절되거나, 해체되었다.
이러한 공동 보육의 축소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원래 막둥이 동생이나 여러 조카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임신-출산-육아를 경험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대가족 생활을 하지 않는 데다가, 형제자매가 적은 80-90년대생 세대들이 아기 엄마가 되었다. 일가친척이 소규모이며 그들 각각도 아이를 적게 낳거나 낳지 않는 경우도 있다. 초 저출산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아기에 대한 간접 경험의 기회가 없다시피 하다. 물론 요즘 사람들은 똑똑하기에 임신과 출산을 준비할 때는 나름대로 각종 서적과 유튜브로 예습을 해보지만, 논스톱 본다고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특히 나와 같은 젊은 세대는 벙 찐 채로 부모가 되어버린다.스스로의 재생산 경험치를 미리 쌓으며 연습할 기회가 없고, 자신의 재생산 경험에 동참시킬 든든한 협력자가 없다.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내 아기는 생 후 두 달쯤 되자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간혹 깔깔거리는 소리도 냈다. 이러한 반응은 신생아기의 배냇짓과 구별 지어 사회적 미소라고 부른다. ‘사회적’이란 단어는 그냥 붙은 것이 아니다. 배냇짓은 신경 반사지만, 사회적 미소는 말 그대로 타인과의 상호작용의 시작점이다. 아기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이나, 행복할 때, 만족스러울 때 이런 표현을 적극적으로 한다. 울어재끼는 것 이외에 또 다른 강력한 어필 방법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아주 독특한 발달 단계이다.왜 웃는 것이 먼저일까?두 달 된 아가는 목도 못 가눈다. 이 시기의 아기는 자기 팔다리도 딱히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젖 빨고 울고 기저귀를 적시는 것 이외의 아무런 ‘기능’이 없다시피 한 미약한 존재이다. 사바나의 야생동물 호모 사피엔스에게, 당연히 신체적 능력 발달이 우선이어야 할 것 같다. 몸을 뒤집고, 힘주어 어미에게 매달리고,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 말이다. 그런데 인간 아기는 희한하게도 그 모든 필수적인 운동능력 대신에 ‘웃기’를 먼저 한다. 고작 자기 머리도 못 가누는 녀석이, 웃어서 어쩌겠다는 걸까?
사회적 미소는 표정을 인지하고 모방, 반응하는 행위로, 아기의 사회화에 중요하다. 미소 짓기와 옹알이는 아기 입장에서 말 그대로 ‘사회생활’이다. 우리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빡센 사회생활은 부장님의 시답잖은 농담에 필사적으로 박장대소해주던 순간이 아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취약한 상태에서, 양육자의 관심을 끌고 적극적으로 반응함으로써 돌봄을 간절히 갈구하던 순간이다. 아기의 뇌는 바로 이 상호작용을 타깃 삼아 발달해간다. 타인의 감정을 읽고 반응하는 것이, 신체 능력보다도 우선하여 등장한다는 것은 아마도 뭔가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아기만 사회적 배선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양육자에게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 흔히들 산후에 아기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다른 일에는 신경을 못 쓰는 산모들에게 ‘애 낳으면서 뇌도 낳아버린 거냐’고도 힐난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눈치가 빨라야 할 수 있는 것이 부모 노릇이다. 아기는 말을 못 한고 글도 못 쓴다. 타인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고도의 정서적, 지능적 행동이다. 양육자는 오감을 넘어선 육감을 동원해서 아기를 관찰하고, 적시에 욕구를 채워주며, 아기와 활발히 상호작용한다. 저절로 타자의 요청에 민감해지고, 감정의 수용성이 높아진다.
호모 사피엔스 아기는 출산과 양육에 생물학적 비용이 아주 많이 필요하고, 유난히 천천히 자라기 때문에 부양에 있어서 사회의 협력적 행동이 필수적이다. 저명한 과학자 세라 블래퍼 허디의『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무려 180만 년 전부터 인간 아이들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돌봄을 받았고, 여러 사람의 돌봄을 끌어내려고 애써왔다. 양육자들과 아기는 일방적인 수혜 관계에 있지 않다. 아기는 적극적으로 양육 참여자들을 변화시키고, 양육 참여자들은 아기의 사회성을 보다 이끌어낸다. 복잡한 상호작용에 힘입어 인간은 다른 인간의 생각과 느낌에 관심을 두고 서로를 의식하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러한 진화적 압력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이타자의 의도를 잘 헤아리고, 협력하는 능력의 기초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마이클 토마셀로는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 짓는 기준으로 <공동의 목표와 의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협동적 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제시한다. 물론 이 모든 진화적 정황 증거들은 전체 집단과 역사적 추세를 나름의 근거를 갖춰 설명하는 것이므로 개인에게 적용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사람이 꼭 아이 낳는다고 인성이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고, 양육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이 반사회성을 뜻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재생산의 경험 또는 그에 관여하는 간접적인 경험이 인간다움의 한 가지 계기로서 작동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양육 공동체가 해체된 시대, 협력의 경험이 메말라버린 오늘날 한국은 전대미문의 초 저출산 국가가 되어있다. 아기가 자라지 않는 마을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30년 후 나의 국민연금? 국가적 경제성장 동력? 어쩌면 그 이상일 지도 모른다.
<참고 문헌>
세라 블래퍼 허디. (2021).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에이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