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공감이 닿은 자리

“자기야, 우리 아기 건강해지겠지?”

남편은 매일 물었다.질문의 형태를 빌린 위로 요청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모름지기 서로 위로를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아무래도 산부인과 의사인 나에게’상대 안심시키기’와 ‘정보 제공’이라는 더많은 의무가 주어졌다. 남편은 아기가 염려스러운 나머지, 가끔은 내가심각한 상태를 일부러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니냐며 말도 안되는 걱정마저 했다. 만약 임신 전의 나라면, 아기가 괜찮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과학자들이나 쓸 법한, 불확정적인 미래에 대한 보류적인 표현 말이다.

“지금 우리 애기는 의증 진단(임상적으로 추정되는 진단으로, 아직 확진은 되지 않은 상태)이다섯개쯤 달려있어. 태어나 봐야 아는 거지만괜찮을 수도, 괜찮지 않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이미 임신을 한 상태인걸! 호르몬의 요동으로 만사에 감정이 무척 민감해진 상태였고, 심장 문제가 있는 아기를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임신 전처럼 과학적으로 엄정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남편보다 한 술 더 떠서 이런 걱정마저 했다.

“건강해지라니? 괜히 그런 말 했다가 아기가 부담스러워하면 어떻게 해! ”

자식의 건강을 기원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예민해진 탓에오죽 걱정이 많았다. ‘건강하라’는 당연한 소망마저 아기에게 스트레스가 될까봐 걱정이었다.

이 늘어가는 걱정은, 또 다른 차원에서 까마득한 거리감을 만들었다. 산부인과는 원래 나에게 편하고 익숙한 곳이었고, 거기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그랬다. 내 검사를 담당해준 의사는 나와 당직실에서 족발 뜯고 떡볶이 먹던 후배와 동료들이었다. 내 아기를 받아줄 교수님은 나에게 밤낮으로 의술을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그러니 나는 출산을 위해 내가 졸업한 대학병원 산부인과에 편히 발을 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기의 심장 이상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병원은 세상에서 가장 낯선 곳이었다. 분명히 익숙한 곳데도 느닷없는 역할을 부여받아 생기는 두 배의 이질감이 있었다. 시작부터 너무나도 오만했던 것이 문제였다. <질병은 환자에게 생기는 문제이고, 나는 치료해주는 의사야.> 나는 이런 식으로, 불운한 일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간과했다. 나는 당사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했다. 아기가 아픈 산모의 마음은 이런 것이구나… 오만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감정이 무딘 편인 나는 환자들에게 갖고 있던 이해의 진폭이 너무 작았다. 아기가 아픈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환자 쪽으로 한 칸씩 내 역할이 옮겨지며 체감하는 것과 공감하는 것이 많아졌다. 대신 초음파 검사 결과지에 한 줄 한 줄, 의증 진단명이 길이를 더해갈 수록 그만큼 나와 동료들의 간격이 한틈씩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전 같았으면 자연스레 나눴을 사담은 나누지 않았다. 괜스레 위축되어서, 할 수가 없었다. 나도 그럴진대, 다른 산모들은 그 거리감을 수백배는 더 느끼지 않을까?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욱 무거울 것이다. 특히 아기가 위중할수록 아기의 부모도 덩달아 약자가 되는 듯하고, 의사의 소견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다는 위기감이 타들어가는 마음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것이다.

타자의 입장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에, 나에겐 경험이 중요했다. (하지만 J선생님처럼 직접 경험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내 첫 임신은 심적으로 괴롭기는 하였지만 나에게 의미가 귀한 배움이 되었기에 글로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혹시 기록하는 것 자체가, 또다른 오만함과 어리석음을 불러오는 것은 아닐까? 내가 섣불리 나의 입장만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 의사의 개인적 경험이 진료의 충실성을 대표하는 것처럼 읽히는 것이 염려가 되었다. 실제로 진료 현장에서 ‘아기 낳아 본 여의사’를 선호하는 산모가 적지 않고, 그래서 남성 산부인과 의사, 또는 무자녀 산부인과 의사가 겪는 현실적 고충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직접 아기를 낳아봐야 산모 진료를 잘 해줄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는 뜻인데,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혹은 이런 생각도 들었다. 치명적이고 심각한 기형을 가진 아기를 품은 임산부들도 있는데, 상대적으로 경증인 내 아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겐 아픔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우리 아기 건강해라’라는 말조차 못 할 정도로 걱정이 많아졌고 매사에 조심스러워졌으니,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기까지는 제법 큰 결심이 필요했다.

나는 아기가 아픈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것이 나에게도 스트레스였기 때문이다. 대신 절친한 산부인과 선배들에게는 마음껏 호소했다. 전공의 수련을 받으며 동고동락 했기에 인연이 깊기도 하거니와, 태아에 대한 이야기라면 척하면 척인 유능한 사람들이다. 나는 부모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하지 못했던 하소연을 재잘재잘 털어놓았다.

“선생님들 글쎄요, 우리 애기가 이것도 안좋고. 저것도 안좋고. 휴… 요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

내 이야기를 들은 선배들이 제각기 관심과 염려를 표현했다.

“그래? 결손 유형이 어떤데? 크기는 재봤어? 별로 크지 않네, 다행이다! 흠, 삼출이 왜 생겼을까. 언제부터 생겼어? 그래도 경증이면 예후 좋은거 알잖아~ 아가도 괜찮아질거야. ”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지식을 보태어 해주는 이야기에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잠자코 있던 한 선배가 말했다.

“맘고생이 참 많았겠네. 그래도 너무 걱정 말아요. 나도 그랬어요~”

돌 된 아기를 키우는 선배였다. 아…! 이 선생님 아기도 심장이 안 좋았었나보다. 나는 놀라면서도, 동시에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선생님 아기도요? 어머, 전혀 몰랐어요. 지금은 좀 어때요?”

그녀가 약간 멋쩍어하며 대답했다.

“아니아니, 제가 그랬어요. 내가 어릴 때부터 pericardial effusion(심낭막 삼출액)이 있거든요.”

의외의 이야기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나 그래서 정말 온갖 검사 다 받고 컸어요. 그런데 괜찮아요. 지금 이렇게 멀쩡히 잘 지내잖아요.”

그 이야기를 나누고 난 다음부터 이상하게 큰 걱정이 들지 않았다. 20주가 넘은 시점이라, 아기가 뱃속에서 매일같이 사지를 놀려댔다.병원에서 일하다가 짬이 나면 스스로 초음파 검사를 하며 아기를 지켜보곤 했다. 혼자서 하는 검사로 세밀한 사항은 알기 어려워도, 적어도 아기가 열심히 쑥쑥 크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기는 아직 보이지 않는 눈을 깜박이기도 하고, 힘차게 팔다리를 휘적여댔다. 때로는 하품을 하다가, 고개를 도리질할 때는 배냇머리가 양수에 흩날렸다. 그 생동감을 온몸으로 느끼니 어려움이 있을지언정, 어찌저찌 해쳐나갈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세상에무서운 병이 얼마나 많은데, 다행이지 뭐야. 우리 아기 병은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야.내가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통계 자료의 숫자나, 연구로 밝혀진 예후의 확률보다 아기의 힘찬 움직임과L 선생님의 씩씩한 목소리가 더 의지가 되었다. <걱정 마. 나도 그랬어.> 그녀는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유쾌한사람인만큼, 우리 아기의 상황마저 긍정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게다가 L 선생님이 나를 위로하고 지지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기꺼이 펼쳐내었다는 사실이 다정히 나의 손을 맞잡아왔다.

곱씹어보니 자신의 경험을 선뜻 나누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것만이 가지는 가치도 있다. 논문과 교과서가 해줄 수 없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료라면, 개별적 경험에 의존하는 것보다 연구와 통계를 참고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료실 밖으로 나온 ‘커뮤니케이터’이기도 하다.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한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간 배워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나의 경험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도 공감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의사다움의 일종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글을 써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이만큼이나  써버렸으니 발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도돌이표 같은 걱정을 그만 두기로 했다. 양수가 모자라서 다소 일찍 태어난 우리 아기는, 다행히 심장이상은 호전되었지만 대신 몇 가지 다른 문제가 있어서 추후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우리 아기, 건강하렴. 물론 아픈 구석이 있어도, 엄마 아빠가 우주만큼 사랑하고 변함없이 돌봐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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