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잠을 다소 설치긴 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우리 아기에게 이상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남편도 수긍하고 안정을 되찾았다.처음에는 하필이면 내가 산부인과 의사라서,남편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마치 스스로를 변호해야 하는 느낌이었달까. (특히 임신 중에 콜라를 너무 좋아한 것에 대해서!) 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확신이 조금만 약했더라면 나는 괜한 자책감에 오랫동안 괴로워했을 것이다.잘 생각해보면, 나는 이미 진료실에서 수많은 기형아 임산부를 만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한 번이라도 아기가 아픈 것이 부모들의 과실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마약, 과음 등은 예외겠지만…) 그러니 당연하게도 나의 아기가 기형일지언정, 나의 잘못이 아니다.
많은 병들은 꼬집어서 원인을 찾기 힘들다. 질병의 법정에 피고인을 세워두고 엄중히 꾸짖는 일은 카타르시스는 있을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드문 일이다.크고 작은 선천성 이상이 모든 태아의 2-3%에서 발병하는데, 상당수에서 원인을 알 수 없다. 물론 명백한 유전적 소인이나 환경물질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꼬집어서 내 아기가 왜 이런 일을 겪는 것인지 속이 시원한 대답이 나오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케이스는 그저 운이 없는 경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느닺없이 소낙비에 젖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어느 구름을 탓할 수 있으랴.
사람이 인과에 집착하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하지만 어떤 일들은 그냥 일어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지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우주의 무심한 무작위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간해서 쉽지 않다. 호모 사피엔스의 뇌는 서사에 익숙해서, 일이 잘못되면 누군가의 과실을 따져야 속이 개운하다. 나쁜 일이 하필이면 나에게, 그것도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났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런 본능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다. 날아오는 공을 반사적으로 피하지 않고, 오히려 막아내기 위해 공 쪽으로 몸을 던지는 골키퍼처럼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니 아기가 아픈 부모들에게 ‘당신 탓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충분히 여러 번 반복해도 좋다.
아기의 이상 소견을 듣고 남편이 나에게 자꾸 설명을 청한 것은, 결과적으로 참 다행이었다. 무척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순간에강제적으로 ‘초보 예비맘 자아’가 뒤로 물러서고 ‘전문의 자아’가 전면으로 호출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나도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우리 아기는 이런 상황이야. 이 질환의 경과를 고려했을 때 앞으로의 가능성은 이런 것이 있어.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기다리는 거야. ”
남편이 약간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산부인과에서 뭐 안 해줘? 아기 아프다며…
“어차피 지금 고칠 수 없어. 아기 태어나면 소아과에서 다시 검사할 거고, 그때 가서 필요하면 잘 치료해주면 돼.저절로 낫는 경우도 많아.그러니 이제 더 걱정하지 말자.”
옳은 소리지만, 실은 나 자신과 남편을 잘 추스르려고 한 말이었다. 그래도 아기에 대한 걱정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자, 비로소 창피함이 느껴졌다. 속으로 스스로가 무척 우스꽝스러웠다. 기형아 검사를 주제로 경연까지 나갔는데, 막상 내 아기가 기형아일 수 있다는 말에 말 그대로 ‘멘붕’했다. 사람들한테 뭔가 설명한답시고 나서서 잘난 척했던 것이 너무나도 민망해서 되돌리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높은 확률로 태아 기형을 걸러낼 수 있는 과학적 검사 기법이 있다며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댔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궁금할 수 있겠다. 나도 임신 초기에 기형아 검사를 통과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내 아기는 왜 심장기형 소견이 보인 걸까?
모든 기형을 미리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NIPT(비침습적 산전 검사)는사실 ‘기형아 검사’가 아니다. NIPT 뿐만 아니라 임신 초기에 시행하는 각종 표지자 검사들(쿼드 검사 등)도모든 기형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며, 태아 기형 중 일부에 불과한 ‘염색체 개수 이상’ 문제를 찾아내는 검사이다. 다운 증후군이 대표적인 염색체 수 이상으로 생기는 질환인데, 이런 특수한 몇몇 질환을 제외하고는 산전 검사로 미리 알아낼 수 없다. 그래서 초기 산전 검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형아 검사는 아니겠으나, 대중적으로 그렇게 부르기 때문에 편의상 기형아 검사라고 지칭하는 것뿐이다. 또한 확진검사가 아닌 선별검사이니만큼, 당연히 오류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래서 선별검사는 기형의 유무에 대해서 확정적으로 단정 지을 수 없고, 결과지도 단지 확률로서 표현한다. (관련 글 읽기)
게다가 임신 중반기에 시행하는 정밀 초음파 또한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일단 태아의 장기는 너무 작은 데다가, 초음파 기법이 투시나 초능력은 아닌지라 볼 수 있는 영역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초음파는 순전히 모양을 보는 검사이므로, 기능에 대해선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장기의 구조는 멀쩡하지만, 성능에 하자가 있다면 초음파로 간단히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최신 검사와 정밀 초음파로도 포착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으니, 미지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넓게 드리운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그 대단하다는 현대의학이나 잘났다는 의사들도 별 것 아닌 것만 같다. 아기의 기형처럼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미리 알아낼 수도 없고, 안다고 해도 딱히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미지를시인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오랜 미덕이다. 무엇이 가능한 것이고, 무엇이 불가능한지를 분간할 수 있어야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아기가 아프다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의학적으로, 선천성 심장 이상을 임신 중에 호전시킬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초음파 검사 결과도 오차의 가능성이 있으며, 내버려 두어도 심장 결손이 저절로 좋아질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러니 나의 판단 하에서는, 잠자코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과학 논문에는 해당 연구의 한계(limitation)를 기술한다. 일종의 자기반성의 시간이다. 이 연구의 부족한 점, 이 연구를 통해서 밝히지 못한 것이 있다면 기술한다. 추가적인 후속 연구로 어떤 내용이 필요하다고 기술한다. 우리는 이렇게 미지를 인정함으로써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의학적 검사나 시술을 할 때에도, 부작용, 단점과 오차의 가능성을 설명하게끔 되어있다. 그러니 의학을 포함하여 과학적 방법론에 기반을 둔 학문은 한계에 대해서 비교적 겸손하고 솔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진솔함을 오히려 인질로 삼고서 공격해대는 사이비들의 공격에 취약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 봐봐. 의사도 모른대.” “의사가 아무것도 안 해주더라.” 하지만 우리가 나란히 앉아서 밀물과 썰물을 기다리고,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무의미한 시간 때우기가 아니다. 내가 그저 아기가 태어나기를 마냥 기다린 것처럼. 그런데 사기꾼들은 미약한 근거와 과도한 자기 확신을 무기 삼아서 속삭인다. “의사도 모르는걸 나는 다 알아. 그들이 못 해주는 것도, 나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지.” 아프고 절박한 사람들은 이런 속삭임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귀중한 시간과 거액의 돈을 허비하고, 끝끝내 오히려 절망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이유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기다리는 거야. ”
다행히 남편은 아기를 위해서 돼지 염통이라도 먹어보자는 이야기를 또 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내 말이, 아픈 아기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이 너무 매정하게 들렸을까 봐 덧붙였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 자기만의 비법을 안다는 사이비 인물을 만나러 외국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거나, 직장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굿이나 요상한 치료를 시도하지 않아도 돼. 뭐가 최선인지, 충분히 판단할 수 있잖아.”
우리의 잘못이 아니야. 지금으로선,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해.
스스로에게 힘주어 말하고 나니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내가 다른 것은 바꾸지 못하지만, 적어도 스트레스는 덜 받는 게 낫지 않겠어? 아랫배 부근에서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이 꾸물꾸물한 태동이 느껴졌다. 모름을 안다는 것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