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임신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평소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매운탕을 사주셨다. 얼큰한 국물을 훌훌 들이키자 할머니는 내가 밥을 잘 먹는 것마저도 너무 기뻐서 손뼉을 치셨다. 할머니, 그게… 저는 못 먹는 입덧이 아니고 많이 먹는 입덧, 먹덧이라서요. 흑흑.
“그래, 병원은 잘 댕기구 있지? ”
내가 근무하는 병원을 말씀하시는 걸까? 아니면 임신 중에 병원 진찰을 잘 받고 있냐는 뜻일까?뭐, 아무려면 어때.
“예, 잘 다녀요!”
“하긴,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니.”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갑자기 궁금해졌다. 여태껏 한 번도 묻지 않다가 그때서야 그 질문을 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할머니는 아기 어디서 낳았어요? 우리 엄마랑, 이모 외삼촌들 말이에요. 60년대에는 산파가 아기 받죠?”“그 시절에, 서울에는 산파가 있었는데 느그 어멈 낳을 적에는 제주도에 사느라구… 그 동네에는 산파 없었단다. 그래서 옆집 아줌마가 탯줄 잘라줬지. 이모들 낳을 때는 친척 언니가 집에 와서 받아주고 그랬제.”
의사는커녕 산파조차 없이, 집에서 하는 출산! 수백 년 전이 아니라, 불과 수십 년 전 할머니가 바로 그렇게 나의 엄마를 낳았다. 나로선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이전, 조선시대의 출산의 모습은 어떨까? 물론 산모 혼자 아이 낳는 경우 다반사였고, 어떤 동네에는 전문 산파가 아예 없기도 했다. 부농층의 경우에도 2/3이 산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층민 농업 노동자의 아내들은 대다수가 혼자 출산했다. [1] 그러니 옆집 아줌마, 친척 언니와 같이 아기를 낳은 우리 할머니의 출산도, 조선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20세기가 되어 근대적 산과 지식을 습득한 조산사와 산부인과 의사가 우리나라에도 등장했지만, 전문적인 의료 혜택을 입을 수 있는 계층은 여전히 극소수였다. 의학적으로 별다른 문제가 없는 정상 분만은 조산사(산파)가 해결했지만, 수술이나 약물, 산과적 술기가 필요한 분만은 지도의사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당대 출산 문화를 기록한 문헌이나, 가깝게는 할머니의 증언만 봐도 1960년대가 되기까지 조산사조차 만날 수 없는 경우도 빈번했다. 한편 1977년 건강보험제 실시,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의 실시로 상황은 병원 중심의 출산으로 급변했다. 이러한 정책적 변화는 산모들이 조산사보다 산부인과 의사를 선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2][3]특히 이 시기에 초음파 기계가 도입되며, 초음파를 통한 산전 태아 검사가 급속히 보급되게 되었다. 자연히 80년대가 되어 출산한 나의 엄마와 이모들은 임신 중에 병원에서 검사도 받았고, 집이 아닌 산부인과에서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아기를 낳게 되었다. 한편 2020년대에 아기를 낳은 나는, 거기에 더하여 산후 조리원과 산후 도우미의 혜택까지 입었다. 불과 두 세대 만에 출산의 풍경은 엄청나게 많이 달라진 셈이다.
할머니의 시절이건, 나의 시절이건, 아기를 품은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짧은 시기 동안 출산과 관련하여 크게 바뀐 지표가 있다. 모성사망비*이다. 아래의 정의는 매우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해 임신 중에, 혹은 출산 관련하여 죽는 임산부의 비율이다.
비교적 믿을 만한 통계가 남아 있는 서유럽 기준으로, 근대적 의학이 발달하며 모성사망비는대략 1/100로 감소했다. 사실 이렇게나 극적인 성공 사례는 의학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찾기 힘들다. 바꿔 말하자면 아기 낳다가 죽을 확률은 과거의 대략 1%에서 0.01% 수준으로 감소하였고, 출산은 과거보다 100배 정도 안전한 일이 되었다. [4] 숫자는 보통 감동을 전하기 어렵지만, 나에게 이 숫자는 감동적이며 자랑스럽기까지 하기에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의학이 모성사망을 줄이는 것에 이론의 여지없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산부인과 의사로서 고생과 노력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반증이다.
한국의 과거에 대한 통계는 없지만, 조사된 조선시대 자료가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조선 왕비 46명 중 4명이 출산 관련하여 사망하였다. 약 9%의 확률이다. 그런데 왕비만 헤아려보니 표본이 너무 적다. 양반 여성들까지 범위를 조금 확장해보자면, 사망률은 13%였다고 한다. [5] …에잉? 처음 이 자료를 접하고 사망률이 지나치게 높게 추정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납득이 간다. 전자간증, 전치태반, 산후출혈, 난산 등은 의료적 처치가 없을 경우 높은 확률로 산모의 사망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래도 대다수의 산모는 무사히 아기를 낳겠지만, 조선시대에는 한 명의 여성이 5-6명의 자녀를 출산했다. 워낙 아기를 많이 낳다 보니, 여성이 임신/출산과 관련하여 사망할 확률은 결코 무시할 만한 숫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모성사망비와 영아사망률*은 한 사회의 보건의료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동시에 ‘중요 척도’라는 딱딱한 관료적 표현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아기를 낳다가 엄마가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혹은 갓 태어난 아기가 숨을 거두는 일은, 부모에게 상상하기도 어려운 고통일 것이다. 물론 나에게 진료를 보러 오는 산모들이 본인이 아기를 낳다가 죽거나, 출산 과정에서 자기 아기가 잘못되리라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 물론 아예 없는 일은 아니지만 – 현실적인 걱정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죽음이 난무하던 시대를 지나쳐왔다. 하지만 합병증과 고통을 최대한 줄이고,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건강한 아기를 만나게 해주는 방법을 의학이 끊임없이 고민해왔기 때문에 세상이 점차적으로 나아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과거에 수많은 여성과 신생아들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산과적 질환을 보다 깊게 이해하고 대응할 방법이 생겼다는 것은 장담컨대 의학사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이다. 그 과정에서 산부인과학뿐만 아니라 소아과학, 초기 외과학, 마취과학 등이 촘촘한 역할을 맡았고, 실제로 감염 예방과 수혈, 마취 같은 눈부신 업적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이 세기적 협동작전을 통해 오늘날의 모성사망비는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영아사망률 : 출생 후 1년 이내에 사망한 영아 수를 해당 연도의 1년 동안의 총 출생아 수로 나눈 비율
모성사망은 지역별로 편차가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리고 그 커다란 낙차를 언급할 때에 반드시 따라오는 이야기가 있다. 개도국의 높은 모성사망률은 대부분명백히 예방 가능한 이유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이후로 대부분의 선진국이 모성사망을 말 그대로 때려잡는 수준으로 제압했는데, 여기에는 정해진 공략이 있다. 이 공략법은 여러 번 검증되었으며 대단히 보편적인지라, 기후나 문화, 인종 등은 큰 변수가 될 수 없다.소독법과 항생제를 원칙에 맞게 활용하고, 필요시에 전문가와 상급 의료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주기적으로 산전 진찰을 받는 것이다. [6] 뭐 그런 뻔하고 당연한 얘기를 하냐고? 그런데 정말로 이게 전부다. 이것만 정확히 지키면 지금도 여전히 1년에 30만 명씩 사망하는 산모의 목숨을 구해낼 수 있다. 모성사망률이 높은 국가는, 안타깝게도 비용과 자원의 문제로 이 공략법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다.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상식적인 수준의 적절한 관리만 확보하면, 아기 낳다가 목숨 잃는 경우를 최소화할 수 있다.
모체와 태아의 건강은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실제로 2020년 기준 대한민국의 모성사망비(11.8)는 OECD 평균(8.9) 보다 높다. [7] 한국 의료의 질적 수준이 낮아서일까? 그럴 리는 없다. 한국 의료는 기대수명, 각종 질병의 사망률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성취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모성사망비가 비교적 높은 것에는 임신부의 고령화와 더불어, 분만 인프라의 지역 격차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이는 놀랍게도,아기를 안전하게 낳기 어려운 지역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산부인과가 단 한 개도 없는 지자체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의료는 결코 세계와 혼자서 동떨어져서 기능하지 않는다. 특히 필수의료는 관심과 정책, 적절한 지원이 투입될 때 비로소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다.
내 아기가 100일 사진을 찍었을 무렵, 친정 엄마는 한 장의 흑백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젊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백일 된 엄마(당시에 흔히들 그랬듯이, 호적에 올리지도 않은 상태), 두 살 된 이모를 데리고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사진 한 번 찍기 참 어려운 그 시절, 카메라 앞에 긴장한 채 앉은 앳된 조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참으로 뭉근해진다. 아기를 낳는 마음은 60년 전이나, 혹은 그보다 더 먼 과거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사이에 출산의 모습은 참으로 많이 변했고, 보다 안전해지는 방향으로 크게 개선되었다.
“하이고, 아가 얼굴 좀 보그래이. 이게 실물이냐? 그린 것 아니냐?”
할머니는 내가 보여드린 입체 초음파 사진에 감탄을 뱉었다. 4D 스캐닝으로 태아의 형태가 제법 또렷이 드러나 있었다.
“워메, 세상 참 좋아졌구마…”
산부인과학 덕분에 세상이 좀 더 나아졌다. 나는 앞으로 세상이 더욱 좋아졌으면 좋겠다.
<참고 문헌>
[1] 박희진. 조선의 결혼과 출산문화.은행나무. 2020
[2]신규환. 20세기 한국 산파기술의 도입과 발전. 연세의사학. 2009
[3] 이현숙.산파에서 조산사로 – 한국 출산 문화의 변화 구자형 외 구술. 국가편찬위원회. 2017
[4]https://ourworldindata.org/maternal-mortality
[5]김두얼. 행장류 자료를 통해 본 조선시대 양반의 출산과 인구변동. 경제사학. 2012
[6] Loudon I. Maternal mortality in the past and its relevance to developing countries today.Am J Clin Nutr. 2000
[7] e-나라지표 모성사망비 항목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27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