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최초의 연결 : 배꼽, 탯줄, 태반

사람마다 배꼽의 모양은 다르다. 나는 배꼽에 구멍을 내는 수술 방식, 복강경 수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배꼽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음. 이 배꼽은 수술 후에도 예쁘게 꿰매주기 쉽겠군’ ‘오, 이 분 배꼽은 독특하게 생겼네.’ 내 배꼽은 그중에서도 움푹 들어간 배꼽이었다. 임신 전에는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아기를 갖고 배가 커지면서 배꼽도 덩달아 점점 솟아오르더니, 어느샌가 아예 밖으로 볼록 튀어나왔다. 그래서 ‘배꼽의 바닥면’이라는, 내 신체에서 상당히 낯선 부위를 만나게 되었다. 분명히 안으로 움푹하고 쪼글쪼글한 주름이 있던, 그래서 거의 보이지도 않던 부위가 반대로 점점 볼록해지며 주름이 팽팽히 펴진 모양이 되었다. 얇은 옷을 입은 날에는 봉긋하게 솟아오른 배꼽이 위풍당당히 자기주장을 했다. 별로 섹시한 모양은 아니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이 상태라면 적어도 배꼽에 때가 낄 일은 없겠어’

생각해보니 이 배꼽은 태아 시절의 나와 나의 어머니가 물리적으로 이어져 있던 흔적이다. 사실 배꼽은 탯줄이 떨어진 흉터일 뿐인지라, 탯줄과 이별한 이후로는 별다른 기능이 없이 조용히 움푹하게 파묻혀있었다. 그런데 태어나고 정확히 한 세대가 흘러 내가 임신하게 되자, 이 오래된 기원이 비로소 볼록하게 또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 것은 참 재미난 일이다.

탯줄은 태반과 태아를 연결하는 동아줄이다. 이 통로로 영양분과 산소를 원활하게 들여오고, 노폐물과 이산화탄소는 말끔히 치워내야 아기는 문제없이 성장할 수 있다. 밥도 안 먹고 공기 호흡도 하지 않는 태아가 쑥쑥 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탯줄을 통해 전달되는 물질 덕택이다. 그러니 탯줄에 이상이 생긴다면 아기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이를테면 탯줄이 꽉 묶여서 매듭이 생겨버린다면, 더 이상 양분과 산소를 공급받지 못한 태아가 잘못되는 불행한 경우도 생긴다. 그러니탯줄은 우리가 세상과 맺은 가장 중요한 최초의 연결이다. 보통 적당히 꼬불꼬불하며, 표면은 제법 질긴 편이라 대략 곱창 정도로 탱글하다. 싹둑 자를 때에도 통증은 없다. 보통 산후조리원에서 나올 때쯤이면 저절로 아기의 탯줄이 말라붙으며 떨어져 나가는데, 나는 이것을 기념 삼아 보관하고 있다.

나의 배꼽, 배꼽에 붙은 탯줄, 그 탯줄의 반대편에는 태반이 있었을 것이다. 포유류에게만 있는 이 기관은 자궁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모체와 태아를 연결한다. 탯줄을 통해 노폐물을 내보내고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려면 태반의 똑똑한 물질 교환 역할이 필요하다. 유해한 물질은 걸러낼 뿐만 아니라, 면역 물질을 전달하고 호르몬을 분비한다. (물론 모든 유해 물질을 완벽히 차단하지 못한다! 임신 중 술, 담배, 마약이 별 문제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이유다.)

태반은 둥글넓적한 원반이다. 통상 생각하는 외계인의 비행접시와 비슷한 모양이다. 형태뿐만이 아니다. 태반은 아기 쪽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산모 입장에서 외부 물질이 맞다. 이 비행접시는 모체 쪽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탑승객을 위한 단단한 기반을 형성한다. 엄마의 몸은 태아와 태반에 어떻게 반응할까? 본래 인체에는 방어를 위한 피아 식별의 기능이 있다. 수상쩍다면 불심검문도, 즉각 처분도 가능하다! 그래서 외계 물질은 원칙적으로라면 공격당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모체는 예외적으로 아기와 태반에게는너그러움을 베푼다. 분명히 모체와 다른 이물질이지만, 면역체계는 이를 눈감아주고 공격하지 않는다. 이를 ‘면역 관용’이라고 부른다. 대신 산모 입장에서는 다소간 면역학적 손해를 본다. 임신 중 면역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태아 입장에서는 이 아슬아슬한 시한부 전세살이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실로 천만다행이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만 빼고, 우리는 모두 이 너그러움에 힘입어 세상에 나왔다.

아기가 태어나며, 탯줄을 자르고 태반이 떨어져 나가는 것은 연결의 종결이 아니다.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는 자연스러운 단계이다.나에게 있어서는 과학커뮤니케이션이 세상과 새로운 연결점을 만들어나가는 기회였다. 경연, 강의, 글쓰기와 같은 활동을 통해서 다양한 방식의 연결을 시도하고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진료실 의자에만 머무르지 않고, 진료실 밖에서도 해볼 수 있는 역할을 찾아 분주히 움직였다. 때로는 설명과 해설을 넘어 설득과 상호 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나름의 노력도 기울였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로 상대를 이해하는 것과, 내가 상대방이 되어보는 것은 다르다. 배꼽이 금방이라도 발사될 것처럼 튀어나온 나는, 의사이며 임신부였다. 이제는 진료실의반대편 의자에도 앉아볼 차례가 되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임신과 출산을 하는 것은, 이미 여러 번 읽어서 결말을 아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일과 비슷했다. 이 사건 다음에는 저 사건이 일어난다. 이 인물과 저 인물의 관계는 이렇다. 줄거리를 대강 알다 보니 딱히 새롭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로서 읽어 내려가는 것과, 그 안에 뛰어들어서 경험하는 것은 너무나도 다른 일이다. 무심히 읽을 때는 클리셰 같은 진부한 신파도, 막상 상황 안에 갇히면 세상 다시없는 비극처럼 절절하게 느껴질 테니 말이다. 나는 임신을 기점으로, 페이지가 닳은 소설책 속에서 열 달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과학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연결이 값진 경험이었던 것처럼, 아기를 낳은 일은 나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연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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