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형 관종인 나는 말하기를 좋아한다. 아주 가끔이지만 환자에게 설명을 잘해줘서 고맙다는 소리도 듣는다. 게다가 의학과 산부인과에 대해서라면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으니, 과학 강연 준비하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보람되리라고 생각했다. 아아- 한 치 앞의 고통도 모른 채 말이다.
강의 자료로 만든 프레젠테이션가안을 두고 신규 과학 커뮤니케이터가기존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에게 피드백을 받는 자리였다.선배들의 날 선 비판이날아왔다.분량, 난이도, 용어, 부적절한 비유, 스토리텔링, 학생 참여도, 컬러와 폰트,디자인 요소, 하다못해 이미지 해상도까지 지적이 쏟아졌다. 윽! 의대생 시절 교수님에게 혼나던 기억이 떠올랐다. 의과대학 교수가 철 모르는 의대생에게 선사하는 참교육은 질문이 덤벼들어 머리채를 휘어잡고, 꾸짖음이 파고들어 들메지기를 하는 진풍경이다. 대신,이런 교육 방식의 장점도 있다.나는 혼이 많이 나 본 사람이라 야단맞는 맷집이 좋다. “제가경험이 없어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지를 못했네요. 부족한 점 많이말씀해 주세요.새겨듣고고치겠습니다.”
과학문화와 과학소통을 위해 일할 인력, 그러니까 과학 커뮤니케이터를 선발한 기관은 여러 단체와 강연 기회를 주선해주기는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강의를 준비하고 강의 능력을 키우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영역이다. 나를 비롯한 새내기 과학커뮤니케이터들은 대개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자원해서 나섰다고 한들, 이런 책상물림들이 처음부터 대중강연에 능숙할 리가 없다.’사람들한테 과학 설명 쉽게 잘하는 비법’은 자격증도 학위도 없다. 어딜 가서 배운단 말인가. 이럴 때는 모름지기 도제식 수련이 효율이 좋다. 다행히 나는 이 방식에 익숙하다.
사람은 누구나 뉴비에게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게다가 과학을 전파하며 희열을 느끼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은 그 본능이 극대화되어있는 사람들이다. 감사하게도 내 개인적인 부탁에 여러 선배들이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지 않고 내어준 덕에, 여러 번의 업그레이드를 거쳐 강의자료는 환골탈태하게 되었다.특히 강의 발전을 위해 소규모 스터디그룹을 만들어서 서로피드백을 주고받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일회성 특강은 교과서 수업과 다른 면이 많다. 단시간에 특정 주제에 대한 흥미를 최대한 불러일으켜야 하기 때문에 서사적, 시각적으로 다양한 장치를 확보해야 한다. 소재에 따라서는 관객 참여를 유도하기도 하고 과학 실험을 삽입하기도 한다. 방법은 다양하지만 꽉 찬 짜임새와 몰입감의 ‘일부러 시간 내서 볼 만한 무언가’를 기획하려면,치밀한작전과 노하우가 필요하다.
어찌 보면 진료실의 갑(?)이다가 일종의 세일즈맨이 된 셈이다.환자는 어딘가가 불편해서 자발적으로 나를 찾아왔다. 아프기 전까지 건강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일단 아프고 나면 의사 말을 진지하게 들어보는 것이 보통이다.남의 몸도 아니고 자기 몸 이야기인데. 그러니최소한의 관객 확보는 할 수 있다. 영화로 치면 손익분기점이 보장된 영화다.하지만 그저 학교 선생님이 신청했다는 이유로 1시간짜리 특강을 들어야 하는청소년들에게 그와 같은 집중력을 기대할 수는 없다. 게다가 과학을 유난히 좋아하는 학생이 몇 명이나 될까. 한 학교는 나에게 온라인 강의로무려300명의 인원을 부탁했다. 강의 시작 10분 전, 원격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교실의 아이들은 어설픈 일일 연자를 놀리기로 작정했는지 짐승처럼 날뛰었다.똑같은 10대들을 산부인과진료실에서 만났을 때는, 입술 벙긋은커녕 내 눈도 못 쳐다봐서 애처롭기 그지없었는데…
“의사 선생님, 이렇게 강의까지 준비해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저희 아이들이 너무 짓궂어서요.”
과학 담당 교사가 교실과 교실 사이를 뛰어다니며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느라 헐떡이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과학은 이당황스러은 순간에도 도움이 된다. 성호르몬에 대한의학적지식이 내 멘탈과 흔들리는 동공을 다잡아준다.사춘기 테스토스테론의 충동질을 어쩌겠는가!
“아이고, 아닙니다. 조용하면 저도 재미가 없죠. 학생들이 밝아서 좋네요. 제이야기가 졸리지 않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아이들이 듣기에 즐겁고 유익한 내용의 과학 강연 주제는 무엇이 있을까? 분량은 1시간 남짓, 대상은 10대 청소년이다. 원래는산부인과 눈맞춤을 고려하였으나, 자칫 선정적으로 비칠까 봐 포기했다. 한편,최신 의학 기술이나 지엽적인 내용을 다루면 난이도가 너무 높아진다. 의학 자체가 고도화된 응용학문이기 때문에 화학이나 물리처럼 상대적으로 친숙한 주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의학 내용은? 건강한 청중에게 의학 주제는 주목도가 떨어지고 학생 강의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 (덧붙여, 건강 관련 내용은 개별적 병원 상담으로 다뤄지는 것이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한다.)과학 커뮤니케이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공계 연구직 종사자들에게는 청소년 진로 상담도 중요한 주제다. “학생 여러분, 과학자의 꿈을 품으세요!” 듣기만 해도 청소년의 밝은 미래와 국가 발전의 청사진이 희망차게 빛나지 않는가? 하지만 나에겐 적당하지 않다. 아직도 의대 경쟁이 그렇게 치열하다는데, 굳이 의사까지 나서서 의대 진학을 부추기는 것은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지옥도가 연상될 뿐이다. 진로 상담도 탈락.
나는 과학사적으로 의미 있고, 의학이 검증된 성공을 거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이왕이면 산부인과 의사의 활약이 들어가면 좋겠지. 덧붙여서 이미 흘러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있으면 최고로 좋은 주제일 것이다. 고르고 골라서 위생-소독-세균설로 이어지는 초기 의학사가 낙점되었다.질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손을 씻어야 한다는 주장을 최초로 들고 나온 사람은 헝가리 출신 산부인과 의사, 제멜바이즈이다. 코로나 시대에 손 위생이 매우 중요해지면서 주목받은 인물이다.영국의 외과의사 리스터는 처음으로 ‘소독’을 고안한다. 소독법은감염으로 환자가 죽는 경우를 극적으로 감소시켰기에, 초기 외과학뿐만 아니라 의학사 전체에서 대단히 독보적인 업적이다. 세균설이 이론적으로 자리 잡는 데에는 독일의 의사 코흐가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그는 미생물학의 아버지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 특정 균이 특정 질환과 연결됨을 밝혀내서 감염병 정복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관련 글 보기)
사실 깊이 들어가자면 상당히 심도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적당히 재미있고 그리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1시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내 나름의 자료 조사와 여러 의견을 반영해서 분량과 난이도, 적절한 용어의 사용, 강의안 디자인을 조금씩 개선했다. 강의 발전 스터디 모임에 참가한 분들은 내가 유머랍시고 넣은 부분은 웃기지도 않은 데다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니 빼자고 권고했는데, 슬프게도 나중에 아이들 반응을 확인하니 이게 정말 귀한 조언이었다… 미안해. 아줌마가 웃겨보려고 너무 애쓴 게 티 났지. 그밖에도 강의 잘하는 분에게 부탁해서 다른 강의를 들어보기도 했다. 과학 전문 유튜버가 주최하는 북클럽에 참여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럴듯한 과학 강의로 탄생시키기까지 정말 여러 번의 교정과, 아주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과학에는 선행연구라는 개념이 있다. 미생물학의 토대를 쌓는 거대한 작업도 당연히 개인의 역량으로 해낼 수 없었다. 제멜바이즈는 손 씻기의 창시자로 널리 인정받지만, 그의 생각이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리스터는 프랑스의 과학자 파스퇴르의 발효와 부패에 대한 연구 논문을 보고 소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코흐의 세균설도 스승의 연구 영향을 받았다. 선행연구를 존중하고 서로의 징검다리가 되어 주는 것은 과학자 사회의 오랜 미덕이다. 나에게도 아무런 대가 없이 기꺼이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다. 이 자리를 빌어서라도 감사의 말씀을 남긴다.또한 아래는 나의 선행연구(!)에 해당하는 자료의 목록이다. 과학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이 있는 또 다른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서) 말문 트인 과학자 / 과학을 아우르는 스토리텔링
두 권의 책 모두 랜디 올슨이라는 전직 과학자, 현직 할리우드 영화감독이 쓴 책이다. 과학자의 의사소통에도 비법이 있을까? 과학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주제로 삼은 매우 드문 책이라 참고하기 좋다. 읽어가며 공감 대폭발에 유쾌함은 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414415
정재승, 칼 짐머, 크리스 무니 등 특히 대중과 커뮤니케이션을 잘 하고 있는 과학자들이 추천하는 이 책은 ‘과학’이라는 알맹이를 갖고 과학자가 대중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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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3807410
저자는 길가메시로 서사의 역사와 중요성을 강조하고,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에서부터 DNA의 발견에 대한 논문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서사로 예를 들어 좋은 서술 원리가 과학적 과정과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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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갈다
삼청동의 ‘갈다’는 과학 도서를 큐레이션 해놓은 일종의 특화된 책방이다. 과학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매력적인 공간이다. 갈다는과학문화 전문인력 양성과정의 일부도 운영하기에, 교육과정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
https://galdar.kr
삼청동 교양과학책방 갈다로 초대합니다 Science Bookshop GALDAR
galdar.kr
(교육) 아쉽게도 지금은 진행하고 있지 않지만, 국가 과학기술인력개발원(KIRD)에서 비정기적으로 과학커뮤니케이터 교육(하리하라/궤도 강의)을 시행한 적이 있다. 다시 교육이 진행된다면 또 듣고 싶을 만큼 추천하는 바이다.
https://alpha-campus.kr
alpha-campus.kr
(영문 웹사이트) 영국 과학 커뮤니케이터 휴 제임스가 과학 발표의 키포인트를 정리한 웹사이트. 간결해서 한눈에 잘 들어온다.
https://www.huwjames.com/universally-speaking
www.huwjames.com
(영어 강의) 과학자가 논문을 잘 쓰는 법을 배우기 위한 글쓰기 스킬 강의이지만, 대중적 글쓰기에도 도움이 되는 내용이 많다. 무엇보다도, 이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나니 내가 이 강의를 듣기 전에 논문을 썼다는 것이 후회가 될 정도로 강의를 잘한다. coursera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Stanford 동영상 강의!
https://www.coursera.org/learn/sciwrite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제공합니다. This course teaches scientists to become more effective writers, using practical examples and exercises. Topics include: … 무료로 등록하십시오.
www.coursera.org
(영문 강의록) 세계 과학 저술가협회의 온라인 강의록. 목차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필요한 부분을 찾기 쉽다.
http://www.wfsj.org/course/index-e.html
www.wfsj.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