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커뮤니케이터가 된 이후 중, 고등학생 강의를 하면 꼭 듣는 질문이 있다. 의사가 되면 뭐가 좋냐는 것이다. 내가 학생 강연에서 다룬 이야기는 의학적 내용도, 의사로서의 이야기도 아닌 과학 역사에 가깝다. 게다가 내가 입시를 치른 아득한 시절 이후로도 강산이 바뀔 만큼 시간이 흘렀는데, 이런 질문이 그토록 흔한 것을 보면 아직도 학생들은 의사를 동경하는가 보다. 그런데 멋지면서 간결한 대답은 참 떠올리기 어렵다! 아마 십 대의 머릿속에선 의사란 돈도 잘 벌고, 전문적인 능력도 있으니 두루 존경받는 그럴듯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내가 겪는 매일매일은 썩 화려하지 않다. 여느 직장인처럼 상사 눈치 보고 (나는 흔한 월급쟁이 의사다), 별점 평점에 좋지 않은 리뷰라도 있으면 쩔쩔맨다. 다만, 확실한 장점이 있는 것은 맞는 것 같다. 나에게 인상적인 한 문장으로 추려낼 재주가 없기에, 대신 구구절절한 일화를 가져와 본다.
내가 수련받은 3차 병원은 전공의에게모의수술 훈련의 기회를 여러 차례 주었다. 인체를 모방한 모형을 구비해놓고 상시로 복강경 수술 연습도 해 볼 수 있었다. 모형 복강경 수술 연습을 수료하면, 살아있는 동물을 대상으로 수술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내게도 이 기회가 주어졌다. 트레이닝 센터와 일정을 맞춰 실험용 돼지의 수술을 하는 훈련이었다. 도착해서 마주친 광경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진짜 수술방과 똑같았다! 마취 기계는 규칙적인 신호음을 내고 있었고, 밝은 무영등이 수술대를 비추고 있었다. 온갖 수술 기구들이 번쩍거리며 진짜 수술실처럼 줄지어 도열해 있었고, 실제 수술에 쓰는 복강경 기계가 세팅되어 있었다. 소독과 수술복 착용도 수술 과정과 동일하게 진행했다. 내 실습을 위해 실험동물 마취를 전문으로 하는 연구원과 전공의 트레이닝 담당 선생님도 미리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시뮬레이션 용도로 이렇게까지 자원과 공간, 인력을 투자해 준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마취되어 호흡기를 쓰고 있는 있는 거대한 백돼지 한 마리였다. 돼지가… 이렇게 컸던가? 평균 체구의 인간보다 몇 배나 큰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취된 채로축늘어져 있으니 더 위압적으로 보였다. 괜스레 무서워져 구석에서 쭈뼛쭈뼛하는 나에게 연구원 선생님이미소지으며말했다.
“돼지 마취가 완료되었어요. 준비되시면 시작하면 됩니다. 미리 동영상공부하고 오신 것처럼 콩팥 제거술을 먼저 해보시면 되겠습니다.”
우리 과 전임의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돼지 수술을 시작했다. 피부도 사람보다 두껍고, 돼지털이 너무 거칠어서 복강경 구멍을 내기가 까다로웠다. 배 안의 장기도 사람과 달라서 낯설었다.
“헉, 선생님. 이것 보세요. 자궁이 사람이랑 달라요. 구불구불하고 기다란데요?”
모든 것을 새로워하는 나와 달리, 이미 병원에서 잔뼈가 굵은 전임의 선생님은 돼지 수술마저도 익숙한 듯 보였다.
“새끼 여러 마리를 낳는 동물들은 자궁이 이렇게 생겼대. 콩팥 잘 떼면, 자궁이랑 혈관 수술도 해볼 수 있게 해 주지. 우린 산부인과니까 자궁 수술도 해봐야지.”
돼지는 마침 암퇘지였고, 자궁 수술을 하게 해 준다는 말에 고무된 나는 잔뜩 집중한 채로 장기 박리를 시작했다. 어느새 콩팥, 자궁, 혈관 그리고 창자 수술까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콩팥으로 가는 굵은 혈관을 묶다 보니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신중하게 돼지 마취를 조정해주고 있는 연구원 선생님한테 물었다.
“그런데 이 돼지는 수술이 끝나면 어떻게 되나요?”
사람은 콩팥 하나 떼어내도 살 수 있으니, 돼지도 회복하면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연구원이 대답했다.
아, 그렇구나. 나는 순간 흠칫했지만 별 반응 없이 수술을 계속했다. 규칙적으로 가슴팍이 오르내리며 숨을 쉬고 있는, 아직은 따끈한 피가 도는 돼지가 내 훈련 용도로 쓰이고 생을 마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실험동물을 사용하는 원칙이란 것이 그런 것일 터이지. 살아있는 생명을 의료 훈련 목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은 다시없을 귀하고 소중한 기회이고, 그만큼 많이 배워가는 것이 내 몫이다. 환자를 대상으로 연습이란 불가능하고, 모형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진짜 피와 살의 느낌은 재현하기 어렵다. 나는 이 이름 모를 커다랗고 하얀 암퇘지를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복강경 기술을 최대한 연습했고, 평소에 하나도 못 듣던 약간의 칭찬을 받은 덕에 나름 들뜨기까지 했다. 그렇게 실습이 끝나고 나니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흘러 있었다. 수술을 함께한 전임의 선생님, 트레이닝 센터 교육 담당 선생님들과 늦은 점심을 같이 먹었다. 허기가 졌던 탓에 배달 온 짜장면과 탕수육을 허겁지겁 들이켰다. 튀김옷 사이로 돼지고기가 고소하게 씹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집에 와서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기만 했다. 참고로 만성피로와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대학병원 전공의가 ‘잠이 안 온다’는건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그 자체로 형용모순적 상황이다. 이 찝찝함의 원인을 찾아내야 오늘 밤을 편안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혹시 내가 동물 애호가이던가? 돼지를 특별히 사랑해서, 가엾게도 죽어버린 돼지를 생각하니 우울한 것일까? 아니, 딱히 그건 아닌 것 같다. 혹시 일하다가 또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해서 벼락 같이 혼쭐나고 풀이 죽은 건가? 요행히 오늘은 아니었다. 그럼 나는 왜 울적한 거지? 잠이 안 와서 구 남자 친구, 현 남편한테 전화를 걸었다.“있지, 오늘은 기분이 영 안 좋아. 내가 오늘돼지 수술을 했는데 말이야…”… 아! 말하다 보니 불현듯 깨달을 수 있었다.
설명하기 힘든 자책감의 원인은 내가 돼지한테 진짜 ‘수술’을 했다고 여긴 탓이었다. 실제 수술실과 감쪽같이 똑같은 환경에서 나도 모르게 교육용 실습이 아닌 실제 집도를 한 것처럼 착각했다. 수술이란 것은 근본적으로 치료이다. 환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진행한 수술이 있던가? 환자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아닌, 나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의 수술을 한 적이 있던가? 그런 치료란 있을 수도 없고, 해서는 안된다. 돼지가 동의한 적도 없고, 돼지를 위해서 한 일도 아닌 실습을 무심코 ‘수술’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강한 이질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마치 수술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스스로의 발전을 위한 훈련이었을 뿐이다.
찝찝함의 근원을 찾고 나니 마음의 짐을 덜어낸 듯한 기분에, 비로소 돼지의 명복을 빌고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러니 뒤집어 말하자면, 그토록 무거운 것이 의술이다. 내가 환자에게 하는 행위에 이해와 동의를 구했고, 나에게 이 치료를 수행하는데 충분한 지식과 경험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환자를 위하는 방향이라는 조건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전제가 없다면 의료는 하나도 의미가 없고, 애초에 성립하지도 않는다. 나는 매년 맞는 예방접종도 무서워서 바늘을 쳐다보지 못하는 쫄보다. 그런 내가 칼을 들어 남의 배를 가르고, 바늘을 남의 살에 찔러 넣을 수 있는 것은 내 행위에 그러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바쁘다’ ‘피곤하다’만 느끼느라 체감하지 못했지만 내 마음속에는 가장 깊은 곳에 강력한 기본값이 설정되어 있었다.‘내가 환자에게 하는 일이,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실습 때문에 희생된 돼지에게는 이 당연스러운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기에 잠시나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의사 하는 것이 왜 좋은가? 특히필수의료분야는 업무 강도가 악명 높고, 인력 부족에 시달린다던대.누군가 내게 물으면, 다름 아닌반복적이고 직접적인 선의의 실현이라고 답해야 할 것 같다. 다만 오해는 말자. 나 자신이 선량하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피곤하면 농땡이 피우고, 이왕이면 적게 일하고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는(원장님 죄송합니다..) 그저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매일같이 반복하는 직업적 활동에 이타적 방향성이 포함되어 있다.그것이꼭 요단강에서 물장구치는 환자를 도로 이승으로 데려오거나, 저승사자랑 눈 부라려가며 담판 뜨는 극적인 순간이 아니여도 된다.때로는 너무 여러 번 해서 지겨워하면서 하기도 하고 때로는 훈련 덕분에 자동반사로 하기도 하는,매일의 일상에선의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내가 대단히 훌륭한 일을 하려고 굳세게 마음먹지 않아도, 쌓이다 보면 저절로 남을 돕는다.이 선의는 공기처럼 모든 순간에 잔잔히 깔려 있어 평소에는 좀처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공기가 그렇듯이,부재하는 순간에는 깨닫게 되어있다. 돼지 수술은 나의 의사 인생에서유일하게나 자신만을 위해서 행한, 선량하지 않은 수술이었다.
의학 드라마에는 비현실적인 열혈 주인공이 종종 등장하는데, 환자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간과 쓸개라도 모조리 내줄 것만 같은 인물이다.실제로도 그 이상으로 훌륭한 선생님들이 있다. 그런데나는그만한그릇이못 될 것이다. 드라마에는 그런 특출난 주인공의 안타고니스트로 대립하는 평범하거나 평범보다 못한 의사들도 있다. 나는아마도그런 예사로운 의사 중 한 명일 것이다.하지만 이렇게 범상한 나마저도가장권태로운선량함을 발휘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의업이다. 그러니 의사가 되는 일은,제법괜찮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