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산부인과 눈맞춤

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가장 젊은 의사가 나였기에, 나는 10대 환자들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산부인과 진료가 처음인 ‘초진’ 소녀들은 진료실에서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데, 그렇게 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앞머리를 죄다 앞으로 쓸어내리고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나를 외면했다. 의식적으로 환자와 눈을 맞추며 대화하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커튼 같은 앞머리에 가린 아이들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변변찮은 사교성을 쥐어짜 내서 최대한 다정하게 대해주곤 하지만, 대답도 어찌나 모기소리 만한지 의중을 알기가 어려웠다. (하긴, 돌이켜보면 열다섯 살의 나도 대화하고 싶지 않은 어른들 앞에서 딱 저런 태도로 버텼던 것 같다.) 10대들에게 산부인과는 이런 곳인가? 의문이 생긴 나는 중고생이 주로 활동한다는 인터넷 익명 게시판을 염탐하기 시작했다. 아줌마가 젊은이들 놀이터에 난입한 것은 미안하지만, 나름대로 직업의식을 가지고 조사한 것이므로 양해를 부탁한다. 그곳에서 찾아낸 산부인과 진료 경험 후기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오늘 산부인과 다녀왔는데, 여자의사였는데도 엄청나게 수치스러웠다.’ ‘최악. 극혐이다.’ ‘가야한다는건 알지만, 굴욕 의자가 싫어서 3년째 안 가고 있다.’ 등등. 익명게시판이라 노골적이고 극단적인 표현이 많은 것이겠지만, 나의 예상보다도 더 부정적이었다.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검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얼떨결에 다리 벌리고 진찰을 받았다. 하지만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너무 모욕적이어서 며칠을 내내 울었다>라는 내용의 댓글이 제법 많다는 것이었다. 내가 본 환자들도 이렇게 생각할까? 나는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고, 환자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착각이었을까? 단순히 친절하게 대하는 것 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불신의 강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선한 환자를 만났다. 여중생이었고, 성경험이 없었다. 자궁과 난소 확인을 위해 초음파 검사가 필요한 상황인데 성경험이 없기에 질 초음파 대신 항문 초음파 검사를 권했다. <이런 식으로 검사를 할 건데, 물론 아프고 불편하겠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필요하다 보니, 조금만 참고 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어린 친구에게 항문 초음파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하면 기겁하게 마련이다. 낯선 사람 앞에서 팬티를 벗기도 싫은데, 저 망측한 의자(진찰대)에 앉아야만 하는 데다가, 항문으로 이상한 기구(초음파 탐지자)가 들어간다고 하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이 환자도 안색이 실시간으로 어두워지는 것이 꺼려하는 기색이 분명했다. 그런데 잠시 고민하다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번도 남 앞에서 속옷을 벗어본 적이 없어서, 이런 거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거든요. 검사를 받아야 된다는 거는 알겠는데… 솔직히 무섭고 창피해서요.”

나는 이 진솔하고 또박또박한 이야기에 적잖이 놀랐다. 이 나이에 그냥 울어버리거나, 피하거나, 도리질만 하지 않고 자기감정을 이렇게 잘 표현하는 친구는 흔치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다행히 그 환자는 내 말을 잘 이해해주었고, 문제없이 검사를 받고 치료도 받을 수 있었다. 하루 수십 명의 환자를 보고 나면 기억에 남는 환자는 한 두 명 정도인데, 그날은 그 여중생의 태도가 특별히 기억에 남았다. 퇴근하면서 곱씹었다. 환자도 힘들고 나도 답답한 평소의 진료와 무엇이 달랐을까? 왜 우리는 어렵지 않게 긍정적인 합의점에 이를 수 있었을까? 그 학생이 유난히 의사표현을 잘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날 따라 나와 환자의 합이 잘 맞았을 수도 있다. 뭐라고 꼬집어서 말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아이는 나와 눈을 맞추면서 본인의 상황과 느낌에 대해서 솔직하게 표현했다. 만약 환자가 지나치게 겁먹거나, 혹은 내가 충분히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면 그런 눈맞춤 대화가 어려웠을 것이다.

옳다쿠나. 나는 그날의 경험에서, 그 학생에게서 뭔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새내기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되어중/고등학교에서강연을 앞두고 있던 나는, 산부인과 진료의 거부감을 조금이나마 상쇄시켜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싶었다. 필요하다면진료 과정과그렇게 하는 이유도, 가장 과학적 성과가 눈부신 부분도 공유하고 싶었다. 무섭고 불쾌한 것이 아니고 쓸모 있고 도움 되는 산부인과학을 소개하고 싶었다. 그러면 진료실에서 어린 환자들과도 더 많은 눈맞춤 대화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그래서 나의강의 제목은 ‘산부인과 눈맞춤’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 강의를 학생들에게 단 한 번도 해주지 못했다.심지어 지금까지도. 수십 번이나 기회가 있었는데 산부인과 의사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면서도 진짜 산부인과다운 소재는 아이들 앞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수많은 핑계 뒤로 숨었기 때문이다.경험이 전혀 없는 대중 강의란 분야에 뛰어들면서, 모험적인 선택은 피하고 싶었다. 괜히 피임 같은 소재를 꺼냈다가 학부모들의 빗발치는 항의 전화를 받는 무서운 상상이 들었다. 콘돔 착용법을 교육했다가 징계를 받았다는 성교육 강사의 뉴스가 떠올랐다. 으으, 나는 진저리 치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꺼내지 말아야지. 혹시 산부인과 진찰 도구(질경) 사진을 보여주는 것은 선정적일까? 아지니, 애초에 ‘질’과 같은 단어가 문제가 될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뱅글뱅글 도돌이표가 되어 가라앉았다.

‘내가 학생 강의 다닐 시간에 병원 진료 보면 경제적으로 훨씬 이득이라고. 그거 포기하고 남 좋은 일 하는 건데, 굳이 불필요한 구설수에 오르내릴 위험까지 감수해야 해?’

나는 비겁하게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어렵게 전문의가 돼서 겨우 살만해지는가 싶었는데 또다시 말썽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내 걱정이 완전한 기우는 아니었다. 실제로 한 도서관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강의가 취소될 뻔했다. 기관의 높으신 분이 ‘산부인과’는 선정적인 소재라는 이유로 강연 담당 직원에게 한 소리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시민 강연 연자로 산부인과 의사를 섭외했냐는 꾸중을 들은 담당자는 풀이 죽은 채로 나에게 연신 미안해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한데요… 이번 강연 건이 아직 결재가 안 났어요.”

심지어 당시는 구체적인 주제도 정하기 전이었는데, 어떤 사람들에겐 내 직업이 너무 야해 보인 모양이다. 쿨한 척 괜찮다고 했지만 더 강박적으로 자기 검열을 해야만 했다. 나는 다루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뒤로 미루어 두기로 했다.

나는 10대 강의는 손 위생을 다룬 의학사 이야기를 주제로 정했고, 성인용 강의에만 산부인과 소재를 들고 나왔다.잘한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세균과 위생의 역사를 다룬 만큼 학생 강의도코로나 시국과 맞물려 호응이 좋았고, 여러 차례 반복해서 강연을 부탁한 학교도 있었다. 산부인과에 호기심을 보이고 많은 질문을 보낸 학생들도 있었다. 다만 10대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부분까지 건드리려면 더 과감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아직도 든다. 아래와 같은 (재수 없는) 잔소리가 대부분인 지금의 글들을 쓰는 것이 적잖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막상 나에게도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산부인과 의사에게 아주 익숙한, 그리고 분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호르몬이 ‘옥시토신(Oxytocin)’이다. 옥시토신은 아기를 낳을 때에 분비량이 크게 증가한다. 자궁을 수축시키고 분만을 진행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호르몬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적, 감정적 반응과도 관련성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옥시토신을 투여한 집단은 감정 읽기와 공감능력이 상승하고 보살핌, 유대와 같은 감정이 강화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1][2] 특히 부모와 아기의 눈맞춤은 옥시토신의 선순환을 일으킨다. 양쪽 모두 사랑받고 충만한 느낌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니 시선을 맞추는 것은 정말로 ‘화학적’인 반응이다. 시선에는 아무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탄생과 사랑의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뇌의 신경전달물질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쳐다보면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방과는 신뢰의 선순환이 생긴다.

일단 옥시토신이 일을 하게끔 만들려면, 용기 내서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다양한 직접적 혹은 간접적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은 유튜브와 같은 매체를 통해서도 산부인과에 대한 이야기나 건강 정보를 제공해주는 유익한 채널이 정말 많다. 임신, 출산 소재를 다루는 웹툰과 수기도 훌륭한 작품들이 있다. 엄마 건강검진받을 때 딸이 같이 산부인과에 한 번쯤 와보는 것도 좋다. 불쾌하거나 망측한 공간이 아니고 그저 병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는 과정의 하나로 말이다. 이런 것은 남성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백신 접종을 위해서, 아내와 여자 친구의 진료를 위해서 기꺼이 산부인과를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산부인과 진료의 높은 문턱을 조금이라도 쉽게 넘으려면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할까?

우리의 눈맞춤을 위해, 함께 고민해보자.

<참고 문헌>

[1]Heinrichs, M., Baumgartner, T., Kirschbaum, C., & Ehlert, U. (2003). Social support and oxytocin interact to suppress cortisol and subjective responses to psychosocial stress.Biological Psychiatry, 54, 1389-1398.

[2]Domes, G., Heinrichs, M., Michel, A., Berger, C., & Herpertz, S. C. (2007). Oxytocin improves “mind-reading” in humans.Biological psychiatry,61(6), 73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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