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문구를 보면 여름철 극장가 대목에 맞추어 개봉한 가족용 어드벤처 영화가 자동적으로 연상된다. 온갖 비일상적인 사건과 개성 넘치는 주인공들이 벌이는 활극과 모험. 예측이 안 되는 상황과 통제가 불가능한 인물이 영화의 소재가 되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은 보통 제법 잘 예측되고 통제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아침에 타는 지하철은 늘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므로 분 단위로 맞춰 움직인다면 늘 같은 지하철을 탈 수 있다. 내 월급은 정해진 날짜마다 들어올 것이고 퇴근 후에는 정해진 요일마다 방영하는 TV 프로그램을 본다. 출근해서 하는 일들도 보통은 마찬가지다. 늘 뭔가를 예측하고 통제하는 일이다. 증상과 검사 결과를 보아하니 환자분은 ##병입니다. <예측> 앞으로 **치료를 해서 고쳐봅시다. <통제>
그런데 우리의 인생에서 아주 인상적일 만큼 예측과 통제가 잘 안 되는 분야가 있다. 다음 세대를 잇는 일이다.섹스, 임신, 출산과 양육으로 이어지는 재생산의 연결고리는 말 그대로 예측불가, 통제 불능이다. 분명히 배란 시기에 맞춰서 부부관계를 했는데 임신은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다. 만삭 임산부의 진통이 정확히 언제 시작할지는 알 수가 없단다. 사랑에 빠질 타이밍을 계산해서 정한 이가 있던가? 게다가 아이가 부모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통제불능성은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과학기술은 예측의 확률을 높이고 거기서 얻은 정보를 통해 상황을 더 잘 통제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바로 그 지점에서 크게 성공했기에 근대 이후로 종교적 위상을 꿰찼다. 이 과학 승전보의 시발점은 당연히 뉴턴 역학이다. 정확하게 발사하기만 한다면 포탄은 의도한 위치에 떨어질 것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거시적 물체들은 뉴턴 역학이 계산한 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변수가 많아질수록 정보가 너무 광범위하지고 예측력이 떨어진다. 날씨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일기예보는 맞을 때도 많지만 때로는 완전히 틀려버린다. 거기에 군중의 기대와 광기까지 섞여버리면 이제는 카오스에 가까워진다. 아까 그 뉴턴 역학을 창시한 천재 중 천재, 아이작 뉴턴도 주식시장에선 쫄딱 망했다. 심리는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측에서 통제로 넘어가려면 숨어있는 단계가 있다. 측정과 평가가 그것이다. 산부인과는 재생산의 연결고리에 언제나 관여하기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의 은밀한 번식 과정도 과학적인 언어로 측정과 평가하는 데에 필사적이다.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촘촘히 나눠서 명찰을 붙이고, 아주 해괴한 증상과 온갖 희귀한 병증까지도 세세히 의학적으로 정의한다. 의학이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과학이 된 것에는, 바로 이 언어화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물론 이 용어들의 난해함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기도 하고, 환자와의 의사소통이 어려워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의학 드라마의 몇몇 장면들이 유난히 멋져 보이기도 한다. “68세 김 아무개 환자 모월 모일부터 시작된 LLQ pain 주소로 ER 경유 내원하여 시행한 APCT 상…” 이런 대사들은 의학 드라마의 애청자라면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무리 복잡한 환자 차트도 언제나 ‘주소’로 시작한다. 집 주소가 아니고 주된 증상(Chief complaint)을 말한다. 주된 증상이 환자와 의사를 만나게 된 이유이고, 의사가 해결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이다. 그러니 의사는 언제나 주된 증상부터 묻는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그런데 산부인과 진료에선 흔히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그게, 거기가 말이에요”
아니면 이런 식이다. “그날에 좀…”
혹은 이런 식 “그거 할 때”
물론 어느 정도는 눈치껏 알아챌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명사가 겹치기 시작하면 의미는 점점 더 불분명해진다.
나는 거시기와 거시기의 향연 속에서 일종의 탐정놀이를 해야만 한다. 생리나 성관계를 의미하는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한다. ‘거기’가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는 본인이 손으로 짚어보라고 한다. ‘누가 그런 걸 남사스럽게 말할 수 있겠어? 의사가 알아서 좀 봐주면 안 돼?’ 하지만 어림짐작하는 것은 금물이다. 특히 “아래/밑이 좀 그래요”라는 말은 최소한 수십 가지 다른 상황을 말한다. ‘아래/밑’도 어떤 환자는 질 근처를 말하고, 어떤 환자는 회음부 전체를 말하고, 어떤 환자는 아랫배나 엉덩이, 서혜부를 가리킨다. ‘좀 그래요’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통증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가렵거나 탁한 질 분비물이 나온다는 뜻이다. 피부에 종기 같은 것이 난 것도, 불쾌한 냄새가 난다는 것도 간편하게 ‘좀 그래요’로 뭉뚱그려진다. 말하기를 유난히 힘들어하는 환자를 만나면 꽤나 시간을 들여서 스무고개를 해야 한다.
그렇게 수많은 ‘거시기’들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확인하면 문제 파악은 끝난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불명확한 단어의 늪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보자.그런 ‘망측한 부위’를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아서인 것 아닌가?그런데 언어화조차 할 수 없는 문제를 과연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환자가 인체해부학을 통달해서 육하원칙에 맞춰 일목요연하게 발언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것은 비싼 등록금으로 공부하고, 오랜 수련을 받은 내 역할이니까. 하지만 유난히 발걸음 하기 힘든 이곳 산부인과까지 온 이상, 무엇이 스스로를 괴롭혔는지 적어도 표현은 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겐 ‘주된 증상’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문제를 정리해서 환자에게 들려주는 습관이 있다. “아아- 그러니까 환자분 말씀은, 매번 성관계할 때마다 질 입구의 통증이 심하시다는 거군요.” 이 발언 자체가 남사스럽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환자와 내가 같은 문제에 대해서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경우에는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문제는 인식조차 힘들 수 있다.언어화를 거쳐야 비로소 명징해지고, 그래야 환자와 의사가 비로소 한 팀이 되어서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할 수 있다.
산부인과에는 분명히 의학적으로 존재하는데 입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 대상이 두려워서이든 부정해서이든 감히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아주 민감한 경우에는 ‘자궁’이나 ‘외음부’ 같은 단어를 듣기만 해도 난색을 표한다. ‘월경’이나 ‘성관계’같은 정상적이고 객관적인 말들이 언어의 늪으로 꾸물꾸물 가라앉는다. 하지만 둘러둘러 모호하게 말하는 것은 문학에서나 강점을 가진다. 같은 이유로 나는 ‘소중한 그곳’ (인체에 딱히 소중하지 않은 부분은 없다.)이나 ‘마법에 걸린 그날’ (의학은 마법적 세계관을 긍정하지 않는다.)도 진료실의 언어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병원은 기발한 비유로 시를 쓰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고,정확하게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곳이다.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인 홍길동이 주인공인 이유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형님을 형님이라고 부르겠다는 진보적 의식 덕분이다. 해리 포터가 ‘해리 포터’ 시리즈의 주인공인 이유는 볼드모트를 볼드모트라고 부를 수 있는 용기 때문이다. 모두가 감히 이름을 부르기 두려워하는 악마적 존재에 대하여, 해리의 스승인 덤블도어가 말한다.
“Call him Voldemort, Harry. Always use the proper name for things. Fear of a name increases fear of the thing itself.”
“볼드모트라고 부르거라, 해리. 뭔가를 부를 때는 항상 알맞은 이름을 써야지. 이름을 두려워하면, 그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커지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