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좋은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미덕

최초의 접점, 산부인과 문턱 넘기 같은거창한 야심을 품은참가자의경연결과는 어땠을까?솔직히 인정하자면 실패였다. 망했다고 표현하지 않는 것은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게다가 유난히 튀는 소품을 준비한 탓에, 행사를 보도한 과학신문 기사에서 간결하고 멋진 발표를 한 1위 수상자와 대놓고 비교당하기도 했다. (‘기상천외한 소품에 의존하는 대신, 기본기에 충실한 대상 수상자’ – 사이언스 타임즈)심지어 기사 본문에서 내 소품의 의미도 완전히 틀리게 기술하는 것으로 한 번 더 확인 사살했다! 과학 기사 쓰는 과학 기자에게마저 내 발표의 의미가 전달이 안 되었으니, 나의 첫 과학 커뮤니케이션 도전은 뜻대로 안 풀린 셈이다.

페임랩의 발표 시간은 3분으로 정해져 있다. 처음에 내 생각은 이랬다. ‘오.. 시간 엄청 짧네. 대본 굳이 안 써도 되는 거 아니야? 그 정도는 뭐, 즉석에서 그냥 말해도 되지. 쉽다 쉬워.’ 발표 시간이 짧다 보니 참가에부담이 없었고, 원고에 딱히 공들일 필요도 없겠다며만만하게 여겼던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준비하는 과정을 거치니 아니 이게 웬걸. 나의 시건방짐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오히려 페임랩 참가가 아주 진지한 일로 탈바꿈했다. 3분 만에 의미 있는 정보를흥미로운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은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다. 세상을 살면서 만나는 많은 윗사람들이 장황한 말로 하급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장황한 말을 늘어놓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간결함이란 미덕을 발휘하려면 중요한 정보를 가려내는 선별력과 덜 중요한 것을 덜어내는 결단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이 경우에는3분이 주어졌으니 3분에 걸맞은 스토리텔링을 짜야한다. 20분이면 20분에, 1시간이라면 1시간에 맞게 조절하는 것이야말로 능력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주제의식에 적당한 시간 안배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16부작 드라마와 2시간짜리 영화는 그 작법과 호흡이 달라야 한다. 과학 강의에서도 같은 원칙이 작동한다.

학술적 논문의 맨 처음에는 언제나 초록(abstract)이 등장한다. 250 단어 정도의 짧은 분량으로 연구의 핵심적인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불필요한 단어는 덜어내야 하고,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만 남겨야 한다. 나도 의학논문을 쓸 때 간결하고 보기 좋은 초록을 쓰기 위해 아주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쌀과 겨를 골라내기 위해 켜켜이 단어의 체를 쳐내는 작업을 반복하며 몇 날 며칠을 지새웠다. 초록은 분명히 아주 짧은 분량인데, 훨씬 길고 긴 본문보다 쓰기가 더 힘들었다! 내 연구 전체를 가마솥에 넣고 푹푹 고아 삶은 다음에 면보에 거르고 쥐어짜내는 지난한 일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엄격한 글자 수 제한에는 의미가 있는 법. 무엇이 주제이고 핵심인지 추려내고 나면 남들이 이해하기 편리하며, 의미 전달이 분명해진다. 이렇듯 잘 정돈된 초록을 통해서 연구자들은 많은 정보를 얻는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지식을 쌓아 올리는 것을 뛰어넘는 특별한 고민이 필요하다. 마치 훌륭한 축구 선수와 좋은 축구 해설자가 다른 것만큼 각각의 분야에서 필요한 역량에도 차이가 있다. 나는 학자가 실험하고 논문을 쓰고 고매한 학회에 서는 것보다, 편한 자리에서 비전문가들에게 쉬운 말로 전달하는 것이 더 가벼운 일이라고 은연중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페임랩을 경험해보니, 고민해가며 의학논문 초록을 쓰던 날들이 떠올랐다. 내가 종사하는 분야의 다른 전문가들에게 나의 연구를 설명하는 데에도 이렇게 많은 고민과 정성이 필요하다.하물며 대중을 상대로 뭔가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면 그 이상의 노력과 숙고가 필요하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사실이 아니다.

이 날 페임랩 심사를 해주신 정재승 교수님은 별로 과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니, 이쪽 분야에서는 슈퍼스타나 다름없다. ‘과학 콘서트’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일 뿐만 아니라 방송과 강연으로 많은 활동을 해오신 분이다. 나는 솔직히 이 바쁘고 명망 높으신 분이 “허허~ 모두들 잘하네~~~ 수고했어요” 정도의 덕담으로 평가를 대신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참가자에게 아주 신중하고 발전적인 비평을 건넸고, 오랫동안 과학 저술과 대중화 활동을 해오신 입장에서 이런 자리의 의의를 깊이 고민해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후 내가 글쓰기를 시작하며 멘토로 삼게 된 ‘생물학 카페’의 저자 하리하라 이은희 작가님에게서도 같은 진심이 전달되었다. 열 명의 참가자가 각기 다른 자기 분야에 대해서 발표를 했는데 개별 사안에 대한 이해도가 정말 높은 것을 느끼고 무척 놀랐다. 뭇사람의 눈높이에 맞춰서 전문지식을 편집하고 가공하는 일에 오랫동안 매진한 분들의 엄청난 내공이 느껴졌다.

이 대회의 입상자는 영국 챌튼엄에서 열리는 과학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기회가 부상으로 주어진다. 특히 대상 수상자는 한국을 대표해 전 세계의 과학커뮤니케이터들과 경쟁하는 더 큰 무대에 서는 영광을 누린다. 나는 솔직히 이 대회의 부상도 욕심이 나던 차였다. 외국에서 즐기는 전통 있는 과학축제, 그곳에 한국을 대표해서 참가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일이 될 것이다. 누구보다 망상을 좋아하는 나는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늦여름의 챌튼엄은 전형적인 영국 도시처럼 잔디가 깔린 구릉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유명 과학 커뮤니케이터, 과학자들이 다양한 강연과 실험으로 축제를 펼치고,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과 흥미로운 경쟁을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영국답게 늦여름이어도 날씨는 무덥지 않지만, 해는 적당히 길어서 축제의 계절에 딱 알맞을 것이다. 적당히 소란스러운 펍(Pub)에서 참가자들과 나누는 과학에 대한 열정 어린 대화가 맥주 안주를 대신할 것이다. 아… 정말 부러웠다.

하지만 부러울 뿐 아쉽지는 않았다. 수상한 참가자들은정말 멋진 발표를 해냈기에, 그들의 재능과 끼가 대단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이어진 뒤풀이에서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각자의 과학 대중화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과학 종사자라고 해서 과학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니, 연애나 진로처럼 현실적인 이야기도 오갔다. 웃고 떠들고 신나게 먹다 보니 집에 갈 시간이 가까워졌다. ‘내일도 병원 출근해서 환자 봐야겠네. 이렇게 재미난 일을 하는 건 오늘 까지는구나.’ 생활인이라면, 직업을 떠나서 단순히 관심사 하나로 모여든 사람들과 진솔한 대화 나누는 매우 기회가 귀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당시에는그 행사가 종점이라고 생각해서 자리를 뜨기 더욱 아쉬웠다. 그때 자리에 함께 한 선배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말을 건넸다.

“이 대회가 끝이 아니에요. 본선에 진출한 사람들은 강연 기회가 생기거든요.”

나는 솔깃했다.

“그래요? 어떤 강연인데요?”

왜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참가하기 전에는 알려주지 않은 거지..!

“학교에서 하는 학생 강의도 있고, 공공기관에 가기도 해요. 하려고 노력하면 기회가 더 많이 올 거구요. 이제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되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실제 현장에 투입되는 거예요.”

불과 몇 개월 후에 나는 강연을 위해 도서지역 학교를 찾아가고,섬 중학교 학생들을 위한 유튜브 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지역 도서관과 대학교에서 교양 강연을 할 기회도 생겼다.코로나 상황으로 많은 부분을 비대면 화상 강의로 진행한 것은 무척 아쉽지만, 감사하게도 1년 남짓한 짧은 기간 안에 수십 차례의 기회가 생겼다. 부족함이 많은 나는 영국 챌튼엄만큼 멀리까지 가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수백 명의 학생과 시민을 만나게 되었고, 결국은 더 넓은 곳에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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