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필수의료(의학의 여러 전공 중 특별히 생명과 직결된 분야)에 종사하는 의료진처럼 나도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있다. 속된 말로 ‘뽕 찬다’고 표현하는 특별한 긍지가 없다면, 굳이 이렇게 고생스러운 일을 하지 않았을 테니! <우리 산부인과 의사들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책임진다. 우리는 여성의 일생 전체에 걸쳐서 건강과 안녕을 책임진다. 우리의 노력으로 태아와 산모의 목숨을 셀 수도 없이 구했으며, 우리의 의술은 각종 여성질환과 부인암, 난임 같은 질병에 가능한 최선의 과학적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이 산부인과라는 말을 들으면 조금 다른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뭉뚱그리자면 ‘야리꾸리함’으로 대표되는 불쾌함과 선정성이다.
<산부인과 병원은 불쾌한 곳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그곳에서의 경험은 불쾌하다>는 통념. 솔직히 이것을 오해라고 불러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당사자가 불쾌하다는 것에 토를 달거나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다른 의료적 행위, 이를테면 부러진 뼈에 석고붕대를 대거나 부어오른 목구멍을 진찰할 때의 불편감과는 차원이 다른 거북함은 산부인과 진료의 커다란 장애물이다. 나의 가장 내밀한, 사적인 부위를 생판 남에게 들이밀어야 한다니! 그것도 이런 민망하고 망측한 자세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뿌리 깊은 거부감은 ‘굴욕의자’라는 단어로 대표된다. 산부인과 진찰대는 양다리를 벌린 채로 드러눕는 자세를 만들어준다. 골반 진찰이나 초음파, 분만 등에 최적의 자세를 만들어주는 도구이지만, 민망한 자세가 굴욕적으로 느껴진다는 사람들이 진찰대에 이런 별명을 붙였다. 모든 의학 기구를 통틀어서 이렇게 미움의 대상이 되는 도구는 산부인과에만 있다. 그래도 그렇지, 꼬집어서 굴욕이라니. ‘굴욕’같은 단어는 삼전도에서 조선 왕이 중국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거나, 신성로마제국의 군주가 교황에게 용서를 빌며 매달리는 거창한 역사적 사건에나 어울린다. 진료 상황에 쓰기에는 너무 강렬한 부정적 어감이라 의사들은 심히 섭섭하다. 그래도 혐오의 역사는 유구하다. 1920년대에 개발된 자궁경부암 검사 기법은 단지 여성의 질에 도구를 넣어 검체를 채취한다는 사실만으로 비판받았다. (그 검사가 살려낸 수많은 환자의 목숨은 비난자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장담하건대 이만큼 진료실 문턱이 높은 진료과는 정신과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환자는 진찰과 검사, 치료에 협조적이어서 큰 어려움이 없다. 그리고 보통은 한 번 방문한 환자가 지속적으로 오기 때문에, 익숙해지면 진찰대도 그리 꺼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환자들은 진찰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단 일초라도 빨리 ‘인간 존엄 말살의 굴욕적 현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온 몸을 버둥거린다. 혹시라도 높은 진찰대에서 떨어질까 봐 다급히 붙잡아 주다가, 발길질에 얻어맞은 날에는 어깨가 축 처진다. 극단적인 경우긴 해도, 이쯤 되면 굴욕은 오히려 내 몫이다. 내 앞에서 당당하게 진찰대를 비난(?)하는 사람은 조금 더 많다.
“굴욕의자 이거 진짜 싫어. 산부인과는 올 때마다 기분 나쁘다니까.”
물론 내가 일하는 곳과 나에게 필요한 도구를 대놓고 혐오스러워하는 게 그닥 달갑지는 않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솟구치려는 짜증을 한번 더 꾹 참으려면, 나 스스로도 치과 가는걸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떠올려보는 게 도움이 된다…)
‘저 분은 산부인과에 오기가 저렇게나 싫었는데도, 참고 여기까지 오셨구나.’
그럴 때 나는산부인과 진료실 앞에 놓인 거대한 가상의 장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내 방의 문턱이 얼마나 높았을지, 이 문고리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가늠하려고 애써본다.
“그러게요. 불편할 수 있어요. 누구라도 그럴걸요. 그런데 다른 방법이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죠. 조금 참읍시다. 환자분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아주 어린 소녀들만 진찰대를 무서워할 것 같지만, 사실 연령은 별로 상관없어 보인다. 아기를 여럿 낳은 아주머니도, 허리가 굽은 할머니도 진찰을 한 번 하려면 공들여 설득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내가 평소에 미처 체감하지 못하는 중요한 사실은, 어쨌든 그렇게 질색하는 환자들조차도 용기를 내 병원에 방문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의사는 병원에 고정되어 있는지라, 애초에 오지 않는 환자는 만날 수가 없다. ‘여차 저차 해서, 이제는 검사를 받아봐야 될 것 같긴 한데, 산부인과 무서워서 몇 달째 안 가고 있어.’라는 익명의 글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병원을 피하다가 너무나 위중해진 채로 찾아오는 불행한 경우가 결코 적지 않다. 그래서 산부인과의 (잠재적) 환자들에게는 치료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최초의 접점을 만드는 일이다.찾아오지 않는 환자와의 만남.솔직히,진료 보러 온 환자를 제대로 봐주기에도 급급한 신출내기 전문의에 불과한 내가 굳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을 보태는 것이 지금도 창피스럽다.어디 가서 목소리를 낼 만한 대가나 명의라면 모를까.그럼에도 불구하고조악한 강연과 어설픈 글일지언정 그 기회에 보탬이 되기를 내심 기대한다. 일단 긍정적인 접점을 만들면, 훌륭한 선생님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우주의 제한 속도인빛의 속도는299,792,458m/s이다. 시공간의 최소 단위인 플랑크 길이는1.616×10^(-35)m이며, 만유인력의 크기를 정의하는 중력 상수는6.67428 X 10^(-11)m^3/kgs^2이다. 길고 복잡한 숫자를 강조하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다. 과학이 밝혀낸 이런 수치들은 우주의 모든 곳에서 동일하고, 인류나 태양계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영원하다. 하지만의학은 그렇지 않다.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사람이 있어야 빛을 발한다. 외계인을 치료하는 데에는 거의 쓸모가 없을 것이며, 어느 날 인류가 멸종한다면 의미를 잃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닿지 못한다면, 의학은 그 효용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산부인과학이, 단편적인 편견의 벽에 가로막혀서 쓸모가 발휘되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으면 좋겠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수상소감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절묘한 발언은, 자막을 읽어야 하는 외국어 영화에 거부감이 큰 미국 관객을 향한 상큼한 일침으로 읽혔다. 자막 없는 영화만 찾는 관객은 세계 각국 영화의 풍성함은 즐기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산부인과 진찰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외국어 영화 안 본다고 죽는 사람은 없지만, 진료를 미루다가 시기를 놓쳐서 건강을 잃는 사람은 많다.) 불가피한 불편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꺼이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커다란 이득을 누린다.
1인치 장벽을 일갈한 봉 감독은, 뒤이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이 발언을 확장시켰다. 정정했다는 표현이 알맞을 수도 있다. “1인치의 벽은, 이미 무너져 있다” 그는 영화를 둘러싼 환경은 이미 세계적으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며, 외국어 영화가 큰 영광을 누리는 것도 별스러운 사건으로 취급받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비쳤다. 산부인과 진료가 ‘큰맘 먹고’ 해내야만 하는 일이 아닌, 일상적이고 당연스러운 일이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