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셔서 앞이 잘 안 보이는 건 운전하다가 눈뽕 맞을 때만 겪는 일인 줄 알았는데, 나는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고 있었다. ‘조명’과 ‘무대’라니!!! 아마 나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일 것이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로 공부랑 진료만 업으로 알고 살아왔고, 튀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며, 남들 앞에 웬만해선 나서지 않는 평범한 의사이다. 그런데 의료가 아닌 활동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점점 욕심이 생겨 야금야금 덤비다 보니 어느새 중계 카메라 앞에서, 그것도 의료진이 아닌 대중을 상대로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생각해 보니, ‘카메라’도 나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 목록에 넣어야겠다..)
흔히들 내향성과 관종 기질은 양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얼굴이 알려지는 건 싫어하지만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나서서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돌이켜보면 본업 외의 일에 늘상 기웃거리기는 했다. 대학생 시절엔 플리마켓에서 좌판 깔고 장사를 했고, 전공과 하등 상관없는 중국어 어학 시험을 쳤다.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어서 자격증을 땄고, 코딩도 배우고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지금도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으니 사실은 좀 특이한 의사인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특이한 나도 의사들이 모인 세미나, 학회가 아닌 곳에서 의료인이 아닌 완전한 대중을 상대로 나의 전공 주제를 말하는 것은 처음이다. 온라인 플랫폼으로 송출 중이라는 카메라가 여러 대라서 어딜 쳐다봐야 할지도 도통 모르겠다.
그런데, 진짜로 처음이던가? 짧든 길든 의사는 늘 환자에게 설명을 한다. 무슨 병인지, 왜 증상이 생겼는지, 치료 계획과 예후에 대해서. 그리고 환자는 의료진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 발표의 경험이 있는 셈이다. ‘청중이 진료실에 앉은 한 명의 환자였다는 점만 다른 거잖아. 지금은 듣는 사람 숫자만 늘어난 거지. 그러니까 이건, 원래부터 내가 할 줄 아는 일이야’ 이런 단순하고도 비약적인 사고 과정을 거쳐서 ‘페임랩 Famelab’이라는 이름의 과학 커뮤니케이션 경연에 참가했다. 언변이 유려하고, 활달한 끼와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 이공계 종사자/대학원생 참가자들 사이에, 상대적으로 나이 많고 음침한 내가 끼어들게 된 사유를 굳이 변명하자면 그렇다.
출처 : 영국문화원 웹사이트www.britishcouncil.kr
(요약 : 과학인들이 대중 상대로 진행하는 3분 분량의 짧은 프레젠테이션 대회. TED를 연상하면 비슷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대회를 통해서 과학 커뮤니케이터(과학을 대중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고 소통하는 직업을 통칭)가 되었다. 과학 커뮤니케이터라는 길고 장황한 명칭의 직업을 처음 들어봤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다. 나도 ‘오늘부터 당신은 국가기관 공인 과학커뮤니케이터입니다’ 라는 내용의 위임장을 받으면서 알게 된 직업이니까. 기존 관념에서 과학은 오롯이 과학자의 영역이고 과학책이나 과학관은 초등학생들의 전유물이었다고 치자. 이에 반해 성인을 포함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지식과 교양을 쌓고, 학계와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이다. 그리고 이런 작업에 특화된 소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과학의 독특한 점이다. 예를 들어 대중음악이라고 생각해보자. 가요 커뮤니케이터가 꼭 필요할까? 나는 음악가가 아니지만 좋아하는 가수를 줄줄이 읊을 수도, 신곡에 대해서 친구와 얘기를 나눌 수도 있다. 간혹 가다 콘서트를 보러 갈 때도 있고, 기분 나면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너 좋아하는 국책과제 있어?” “요즘 최애 과학자가 누구야?” “우리 데이트하러 연구소 견학 갈래?” 따위의 질문을 한다면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것이다.
현대 과학은 아주 세분화되었고 전문성의 벽이 너무 높아진 나머지, 학계 바깥의 사람들에게 어떤 연구나, 성과나, 결과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극도로 까다로워졌다. 그래서 오늘날의 과학은 마치 실패한 농담처럼 구구절절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도 굳이 ‘커뮤니케이터’까지 동원해 가면서 말이다. 특정 분야에 ‘커뮤니케이터’가 별도로 필요한 영역이 하나 더 있다. 동물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다. 반려동물이 애초에 사람들과 말이 잘 통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왜 등장하겠는가. 실제로 찐과학의 언어는 웬만한 사람들에게 개 짖는 소리보다 파악이 어렵다. 이것만 봐도 과학/과학자 사회와 평범한 생활인들이 얼마나 분리되어 있는지 거리가 가늠된다. 과학은 통역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냥 단절된 채로 내버려 두기에는 자금 조달과 추진 과정에서 여론의 영향을 받거나, 다수의 사람들이 협력해야만 해결되는 과학적 주제가 너무나 많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은 그 거대한 첨단기계가 지구로 보내준 환상적인 이미지와 그에 대한 인상적인 해설이 없었다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막대한 예산과 여론의 지지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코로나19 시대에 예방의학 전문가들이 연구 결과를 직관적이고 간결하게 전달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전국민적인 협조는 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런 필요성 때문에 과학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신생 분야가 생겼다. 그리고 페임랩은 국내에서 과학 커뮤니케이터를 발굴하고 교육하는 몇 안 되는 등용문이다.만약 페임랩이 아니었더라도, 내가 다른 경로를 통해서 산부인과와 산부인과학에 대해서 뭐라도 말하려고 애를 썼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경연을 통해서 대중 친화적인 접근에 대해 진지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과학 대중화 활동에 관련된 다른 기회도 많이 생겼으며, 강연과 저술로 연결되는 발판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 비록 멀리 돌아가는 길이 될 것 같지만 – 내 사연은 페임랩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