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현재까지 가장 과학적인 답변은 DNA이다. DNA에 담긴 유전자가 당신을 ‘코딩’한다. 다만 개발자는 따로 없다. 전적으로 엄마 쪽, 아빠 쪽 유전자의 반반 랜덤 박스이다. 나도, 당신도 수정되는 순간에 하나의 인간을 정의하는 코드는 전부 결정되었다. 책으로 치면 원고와 교정 교열이 완결되어 모든 활자가 인쇄되고 종이 뭉치가 정갈히 제본된, 한 권의 책이 출간된 것이다.
다만 DNA라는 생명의 대본이 작성되었다고 그것이 운명이 되지는 않는다. DNA 자체는 내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에서 일생동안 유지되지만, 그 발현은 내외부의 영향을 받아 역동적으로 변화한다는 최신 연구 결과가 쏟아지고 있다. 맥락에 따라서 어떤 유전자는 후천적으로 더, 혹은 덜 활성화된다.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후생유전학이라고 부른다. DNA가 생물학의 왕좌를 차지한 이래로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믿음이 스멀스멀 퍼져나갔지만, 후생유전학은 그러한 결정론을 뛰어넘는 의미심장한 함의를 제시한다. 환경과 상황이 동일한 대본도 완전히 다른 결과물로 빚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의 책을 쓰는 작업이, 하나의 인간을 탄생시키는 일과 참 비슷하다는 감상에서 시작해 이 시리즈를 쓰게 되었다. (때마침 내 책은 임신과 출산을 다룬 책이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 유전자를 텍스트에 비유하는 후생유전학은 언제나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책에게도 태어난 이후의 삶이란 것이 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책도 동일하게 ‘작동’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가 읽느냐에 따라, 그리고 읽는 이가 어디에 밑줄을 치며 읽느냐에 따라 다른 감상이 나온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그러하다니, 절묘하지 않은가?
《출산의 배신》출간과 함께 피드백이 본격적으로 쏟아졌다. 여러 일간지에 연이어 서평이 올라왔다. 인터넷 기사에 적지 않은 댓글이 달렸다. 독서 블로그에 정성스러운 감상문이 올라왔다. 나는 책을 출간하면서 나의 책 쓰기가 ‘끝났다’는 느낌에 취해 있었다. 그런데 독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이제부터 비로소 뭔가가 시작된다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책은 나로부터 독립해서, 그 나름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듣기 좋은 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의사로 편하게 사니 고작(!) 애 낳는 걸 힘들어한다는 비아냥, 저출산과 출산 공포를 조장한다는 오해, 개인적이고 남사스러운 이야기는 일기장에나 쓰라는 비난 등등. 하지만 성의 있고 배울 점이 많은 비평이 훨씬 많았다. 독자마다 본문에서 중요하게 여긴 부분이 다르기도 했고, 어떤 지점에서는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다. 모두 귀하고 소중한 피드백이다. 나는 그 다양한 감상을 통해서 임신과 출산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해석되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니 한 권의 서적도 출간 이후의 삶이 이어지는 셈이다. 각각의 독자를 통해서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는 느낌이랄까. 인쇄와 제본이 끝났으니 형식은 완결되었을지언정, 읽는 이에게서 비롯되는 지평은 또 새롭게 펼쳐진다. 어떤 이는 책에서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책의 부족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글에서 감동을 받기까지 했다. 어떤 이는 나에게 반박을 하려고 펜을 집어 들지도 모른다. 생명체가 다양하고 경이로운 것은 하나의 시점, 또는 하나의 운명으로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에도 여러 독자의 감상과 해석이 덧붙여지면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한다는 느낌이 든다면 너무 거창한 것일까?
두 돌이 넘은 아들 녀석은 이제 뭐든지 혼자서 하려고 한다. 어설퍼도 젓가락질을 스스로 하고, (실패가 빈번하지만) 용변을 볼 때는 변기를 쓴다. 안전벨트도 혼자 맬 수 있다고 우기고, 바나나 껍질도 꼭 저가 벗겨야 만족한다. 아기가 “내가!!”라고 소리치면 약간 불안하면서도 제법 대견하다. 나 없이는 젖도 못 빨아먹고 앙앙 울던 녀석이다. 그가 어느새 훌쩍 자라서 개성과 자율을 확립하는 것을 보면 은근히 뿌듯하다. 내 몸 안에 오롯이 품어 키운 생명이, 이제는 스스로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모름지기 아기를 낳았으면 그다음은 독립이 순서다. 품 안의 자식이라고 해도, 언제까지나 품 안에 둘 수 없다. 《출산의 배신》도 세상과 소통하며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내가 닿지 못한 곳까지 닿게 될 것이다. 책 낳은 일의 진정한 보람 아니겠는가.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지평이 더욱 기대된다.
<참고 문헌>
데이비드 무어. (2023).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 아몬드.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신, 출간, 육아 이야기
》연재를 12화로 마칩니다.
조만간 《당신의 작품은 안녕하십니까 : 글 쓰는 이를 위한 웹 콘텐츠 큐레이션》으로 찾아오겠습니다.
소소하게 작가 개인 웹사이트 등을 만드는 이야기가 될 예정입니다.
아주
가볍고
편하게
적어보려고 합니다.